처음 수업을 시작하는 어린이들의 부모님에게 안내문을 드린다. 여러 가지 당부 사항과 함께 이런 문구를 적어 놓았다.
‘수업을 중단하실 경우 최소 2주 전에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린이가 좋은 이별을 경험할 수 있도록, 지금까지 한 활동을 정리해 주고 마지막 선물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이별의 조건은 단순하다. 수업을 종료하기 2주 전 부모님들의 연락을 받을 수 있는 것. 그러면 나는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그동안 어린이가 했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활동지와 공책을 꼼꼼히 살펴 이 어린이가 나와의 수업을 그만 둔 뒤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갔으면 좋겠는지 조언해 줄 말을 생각하고, 어린이에게 편지를 쓰고, 좋아할 만한 책을 골라(또는 본인에게 직접 물어) 선물한다. 수업 마지막 날 어린이는 다른 친구들과 인사를 건네고 서로 덕담을 하며 간소한 헤어짐의 의식을 치르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런 나의 소망은 이뤄지는 경우 보다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학부모님들은 마지막(나는 마지막인지 전혀 가늠하지 못한) 수업 전날, 또는 당일 전화해 만남의 종료를 알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수업 10분 전에 전화해 오늘부터 아이를 보내지 않겠으니 오늘 치를 포함한 나머지 교육비를 환불해 달라는 경우도 있었다.
참담했다. 요즘 아이들 말대로 ‘손절’ 당한 느낌이었다. 매일 어떤 활동을 해야 아이들이 즐거워할지 고민하고 온 마음을 다했던 결과가 이것이었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건만 적어도 좋은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좋은 헤어짐의 시간은 어린이의 미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한 채 어린이와 헤어진 후에는 우편으로 선물할 책 등을 보내주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파일과 공책들이 선반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면 자못 씁쓸했다.
그러다 얼마 전 윤홍균 정신과 의사의 책 ‘마음 지구력’을 읽고 화들짝 놀랐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지인 관계의 특징은 필요에 의해 가깝게 지낸다는 점이다. 명함과 연락처가 있지만 별일 없이 연락하지 않는다. “생각나서 전화해 봤어. 잘 지내?”하며 안부를 물으면 실례가 되는 관계다. 식당의 주인과 손님, 직원과 기업 대표, 학원 선생님과 수강생 관계다.’
이런, 어린이들에게 그저 ‘끊고 싶은 곳’인 학원의 선생님 주제에 감히 좋은 이별을 꿈꾸다니 가당키나 한 일이었나. (학교) 선생님도 아니면서 선생님 놀이에 내가 너무 과몰입했구나. 오늘부터 아이들과 적당히 거리 두기 해야지. 아이들과 나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니고 친구 사이는 더더욱 아니잖아. 착각하지 말자. 아이들이 그만 둔다고 하고 바로 안 나와도 상처 받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새롭게 들어올 3학년 부모님들에게 건네 줄 안내문에서 ‘좋은 이별’ 운운하는 문구를 차마 뺄 수가 없다.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