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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통로이현아 Jan 26. 2018

여행드로잉, 말로 그려보세요.

[뉴욕서점에서 만나다(1)-idle wild]

                                                                    

[뉴욕서점에서 만나다(1)-idle wild] 여행 드로잉, ‘말’로 그려보세요.                                                           

 여행전문서점이지만 책만을 파는 서점은 아니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스터디 룸, 바닥엔 카펫이 깔려있었고 칠판에는 분필로 프랑스어가 쓰여 있다. 이 서점은 이 곳 만의 특화된 외국어 강좌가 상당히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다양한 언어가 혼재해있는 이 공간은 간이공항 같다. 전 세계 어디로든 금방 데려가 줄 수 있는 작지만 신비한 공간. 이 공간에서 간단한 입국 수속을 마치고 파리를 이야기하는 소설책과 지도를 한 권씩 챙기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어가 빼곡하게 써진 스터디 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것이다. 그러면 훌쩍 샤를드골 국제공항으로 날아갈 것만 같다. 실제로 이 서점의 이름인 ‘아이들 와일드’는 뉴욕 JFK 공항의 원래 이름이라고 한다.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이 서점에서 만난 나의 한 권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그린 드로잉 북, An Italian Journey이다. 작가는 책머리에 장화모양의 이탈리아 땅을 그려놓고 자신의 드로잉 여정을 빨간 화살표로 보여준다. 시칠리아에서 베네토까지, 이 예술가가 펜 끝과 붓 끝으로 그려낸 것은 그야말로 벨 파아제(bel paese)다. 내가 이 책에 매료된 이유는 책을 세워들었을 때 만날 수 있는 극단적으로 길게 조각난 세로 화면의 캔버스 때문이다. 이 책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jewel-like) 판형으로 화면 가득히 타이트한 앵글이 들어차있다. 이 손바닥 만 한 작은 화면 안에 풍광을 담기 위해 작가는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을 발휘한다. 


  독자는 때때로 책을 세워들고 세로 화면으로 타이트하게 그려진 풍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작가가 긴 뷰파인더를 통해 가로10cm*세로30cm의 세로 화면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10호P(풍경형) 캔버스의 크기는 가로53.0cm*세로40.9cm 이므로 작가가 연출한 세로 화면은 하나의 캔버스를 길게 다섯 조각 낸 것과 비슷한 셈이다. 이 좁다랗고 기다란 공간에 풍광을 담아내기 위해 작가는 색다른 시선으로 구도를 잡고 거리를 포착해낸다. 판테온을 담아낼 때는 바닥에만 절반의 공간을 할애했다. 그러자 바닥에서 위를 바라본 시선으로 넓은 공간을 광각의 느낌을 살려 담아낼 수 있다. 로마의 다리는 가까이 보이는 가로선을 극단적으로 확대했다. 그러자 후경으로 따라오는 세로선의 다리와 건너편의 건물을 거리감을 살려 담아낼 수 있다. 
   

  
이탈리아의 두오모 성당을 떠올리면 당신은 어떤 풍광이 그려지는가? 우리의 눈은 두오모 꼭대기에서만 뜨여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순간을 두오모의 전형적인 풍광으로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여행자들이 탁 트인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감격의 순간에 카메라를 꺼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여정에도 많은 것을 본다. 아치형으로 이어진 기둥에 주목하기도 하고, 고풍스런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전신주가 눈에 거슬려 한참을 성가시게 바라보기도 한다. 작가는 극단적으로 길게 조각난 캔버스 화면을 통해 바로 그런 것들을 바라보게 한다. 그의 화면에서 우리는 두 개의 성당 건물 사이로 보이는 직사각의 파란 하늘에 주목하게 된다. 길쭉한 화면 안에 붙잡아 놓으니 비로소 생경한 시선이 그 곳에 머문다. 이 작가의 보석 같은(jewel-like) 화면에 매료된 이유다. 

An Italian Journey에는 가던 길을 멈추고 쪼그리고 앉아서 선을 긋고 구도를 잡아낸 흔적이 담겨있다. 몇 번이고 풍광을 세심하게 바라보았을 그의 시선이 그림 안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대학원 동기가 유럽과 남미를 여행하면서 그렸다던 길드로잉을 떠올렸다. 그는 종이컵을 물통삼고 플라스틱 뚜껑을 팔레트삼아 쪼그리고 앉아서 먹물과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끼적이고 있으면 현지인들이 다가와서 힐끔힐끔 구경한다고 했다. 그의 붓 끝에서 먹의 농담으로 펼쳐내어진 풍광은 여행자의 시선과 현지의 생동감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장면은 그림으로도, 사진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다. 오로지 섬세한 시의 언어로만 표현되는 어떤 정서와 분위기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심취한 것은 드로잉도 사진도 아닌 ‘말 그림’ 이었다. 단순히 ‘좋았다, 아름답다’는 관념에서 나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 내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했는지를 말로 그려보는 것이다. 말로 그림을 그리면 심리적 언어로 장소를 묘사할 수 있다. 이를테면 ‘파도가 하얀 거품을 내며 넘실댄다.’에서 ‘파도는 대범하게 부서지며 태평양을 넘나든다.’로 나아가는 것이다. 심리적 묘사는 어떤 장소가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가에 대한 힌트를 준다. 단어와 형용사로 더듬어 짚어 가다 보면 물안개처럼 뿌옇게 가려진 것들이 점차 윤곽이 드러난다. 내가 느끼는 아름다움의 구체적인 원인을 찾게 되고 세밀한 부분까지 보는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말 그림은 먹물과 고체물감과 붓을 들고 다니면서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지 않아도 된다. 그저 질문과 대화 만 있으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다. 

 뉴욕에서 한참을 ‘말 그림’에 빠져 있다가 서울로 돌아와서 제목만으로 집어든 책이 있다.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른바 ‘시각적 산문’이다. 이 책에서 사진은 서두에 단 한 장 등장한다. 그야말로 사진 한 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소설을 쓰는’ 책인 것이다. 같은 여행지에서 같은 장면을 보고도, 같은 서점에서 같은 책을 보고도 우리는 각자의 소설을 쓰면서 살아간다. 내 눈에 들어온 만큼 내가 손으로 만진 만큼, 그렇게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말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 글을 쓴 이현아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고 발견하는 삶을 가치롭게 여기며 교육과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의 본질도 ‘삶 속에서의 의미만들기 과정’ 과 다름없다고 믿습니다. 교실에서 의미를 발견한 날부터 아이들에게 스며흘러가는 통로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배워서 남 주는 삶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교육미술관 통로를 운영하면서 어린이작가들과 창작그림책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교실 속 그림책]이라는 총서명의 그림책 시리즈를 독립출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교육자이자 연구자(A/R/Tography)의 한 사람으로서 독서교육과 미술교육의 두 맥락에서 그림책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을 이끌어내며, 가치로운 교육적 역할을 실천해내기를 소망합니다.     


*홈페이지 교육미술관 통로 http://www.museum-tongro.com

블로그 http://blog.naver.com/okas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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