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온 글, 이덕화 그림
다섯 걸음
"이번에 또 캄보디아에 다녀온 거야? 벌써 다섯 번 째 아니야?"
J언니는 봇뱅마을을 다섯 번이나 다녀왔다. 2013년, 2014년, 2017년... 같은 마을을 다녀왔지만 매년 다른 이야기를 품고왔다. 언니와 만날 땐 주로 가벼운 운동화 차림으로 만났다. 날 좋을 땐 경복궁에서 부암동까지, 반포에서 신사까지 깜깜한 골목길을 걸으면서 꼬리에 꼬리를 물듯 이야기를 쏟아냈으니까. 주로 이런 이야기였다.
'소비하기만 하는 여행 말고 나누는 여행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책으로 읽은 걸 어떻게 삶으로 흘러가게 할까?'
언니가 봇뱅마을에서 아이들을 만나고올 때마다 이야기는 더욱 견고하고 단단해졌다.
"언니 이 이야기 책으로 엮으면 어때? 우리랑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것 같아."
그렇게 2018년 가을, J언니는 그 이야기를 한 권의 그림책으로 깁고 엮어서 세상에 내놓았다.
첫 인상
이 그림책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저자는 어느 날 우연히 웹에서 학습지 한 장을 보았다. <난 행복한 사람>이라는 제목을 가진 학습지에는 한 아이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빵가루를 주워먹는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있었다.
"나 자신을 그림 속 아이와 비교해보고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해봅시다."
이상하리만큼 어리석은 질문에 아이는 현명하게 대답했다.
"남의 아픔을 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같이 아픔을 해결해주려하고 같이 잘 먹고 잘 살아야 될 것이다."
저자는 처음 이 질문을 읽었을 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비록 본인이 던진 질문은 아니었지만 3년 전 처음 봇뱅 마을을 찾았을 때 했던 생각과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판자 몇 개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집과 비쩍 마른 개들, 그리고 해진 옷을 입고 맨발로 거리를 누비는 아이들... 봇뱅 마을의 첫 인상은 불쌍하고 안쓰러웠다.
그렇게 동정의 마음으로 낯선 광경을 바라보았을 때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감정은 다름아닌 '감사'였다. 시원한 에어컨을 쐴 수 있어서 감사, 신발을 신을 수 있어서 감사... 새삼스레 모든 것이 감사로 느껴졌다. 저자는 바로 그 부분에서 고민을 시작했다. 비교의 잣대로부터 나오는 감사는 순간 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이 동정과 감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저자는 모호한 감정들을 이 그림책을 통해 더듬더듬 짚어나간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에서 시작하기
그림책 <맨발로 축구를 한 날>의 주인공 수민이도 봇뱅마을을 방문한다. 삼촌을 따라 비행기로 5시간 반, 버스로 4시간, 보트로 30분을 가서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다. 운동장을 들어서니 아이들이 맨발로 축구를 하고 있다.
"수민아, 너도 같이 해봐. 애들 엄청 빠르다!"
"싫어요, 더럽잖아요."
아이들을 보고 수민이가 무심코 던진 첫마디이다. 어른들은 따옴표 안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이들은 쌍따옴표로 내뱉는다. 이 그림책은 아이의 솔직한 쌍따옴표를 존중한다.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놓고서 '아차' 후회하고 멋쩍어하는 있는 그대로의 마음,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친구가 되기
수민이는 삼촌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에 간다. 다리를 건너면 10분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강을 쭉 돌아서 한 시간동안 가보기도 하고 냉장고가 없는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스크림을 포기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나눠 줄 빵과 과자를 잔뜩 사서 돌아오는 길에는 물소를 몰고 가는 아이를 만난다.
시원한 바람을 느끼면서 달리던 수민이는 이제 속도를 조금 늦춰보고 싶어진다. 물소와 나란히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촌, 조금만 천천히 가요." 어느덧 수민이는 봇뱅마을의 속도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
물소 곁을 나란히 가면서 수민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심코 스쳐지났던 아이의 표정도 살피게 되고 '어디를 가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했을 것이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또르르 떨어지는 것도 느끼고 사방에 눈부시게 푸르른 나무들도 그제야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까. 물소와 나란히 걷고 난 이후 수민이는 태도가 달라진다. 더 이상 봇뱅 망을의 아이들을 낯설어하지 았는다.
수민이는 아이들과 신나게 뛰놀면서 어느새 친구가 되었다. 물총싸움으로 온몸이 흠뻑젖고 공을 툭툭 차면서 어느새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가 허물어진다. 흙탕물에서 서로 뒹굴때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면서 '너'를 동정하거나 '나'를 감사하지 않는다. 그저 함께 어울려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 지금 이 순간의 '우리'가 존재 그대로 충만할 뿐이다.
삶으로 이어가기
이 책의 저자인 J언니는 좋아서하는 그림책 연구회 운영진으로 함께 하고 있는 조시온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나와 첫 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누었던 이야기는 여덟 명의 연구회 운영진 선생님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면서 더욱 깊고 넓어졌다.
이번 달 연구회의 화두는 '나눔'이었다. 한 선생님은 매년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굿네이버스 후원 영상을 틀어불 때마다 느껴왔던 묘한 불편함을 털어놨다. '우리는 어떤 지점이 불편한걸까', '아프리카 소년을 후원하고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도 내 안에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모호했던 것들을 명확하게 짚으면서 아이들에게 어떻게하면 조금 더 나은 가치를 전해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글쎄, 내가 과연 나눈게 있을까' 갸우뚱했던 우리도 사실은 각자의 삶 속에서 귀한 것을 나누고 있었다. 스물 넷, 학교에 정식발령을 받기도 전에 아이들을 만나고 싶은 뜨거운 마음 하나로 공부방을 오가면서 봉사활동을 했던 선생님이 있는가하면, 고사리 손을 가진 아이들과 함께 우쿠렐레를 뚱땅거리면서 재능기부를 한 선생님도 있다.
아이들과 함께 만든 그림책을 영어로 직접 번역해서 캐리어에 싣고 가서 인도네시아의 아이들에게 전해준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아닌 엄마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눈물 쏟는 선생님까지... 글을 쓰면서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했다.
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서 한 수 배웠다고 털어놨다. 나눔에 대해 한창 열띤 토론을 펼치는데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도움을 함부로 주면 안 돼요. 그 사람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도움을 주면 그 사람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이니까요. 내 판단보다 상대방의 판단을 더 존중해줘야 해요."
너와 나를 비교하지 않으며 동정도 감사도 없이 서로 친구가 되는 방법, 어쩌면 아이들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림책 <맨발로 축구를 한 날>의 주인공 수민이처럼 말이다. 신발을 던져버리고 흙탕물이 가득한 발로 신나게 축구를 하고 있는 수민이는 어느새 좋아하는 친구들을 닮아있다. 너와 내가 결코 다르지 않음을 기억하면서 온 몸으로 그 안에 뛰어들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다.
* 글을 쓴 이현아는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가고 발견하는 삶을 가치롭게 여기며 교육과 예술이 지향하는 궁극의 본질도 ‘삶 속에서의 의미만들기 과정’ 과 다름없다고 믿습니다. 교실에서 의미를 발견한 날부터 아이들에게 스며흘러가는 통로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고 배워서 남 주는 삶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교육미술관 통로를 운영하면서 어린이작가들과 창작그림책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으며 [교실 속 그림책]이라는 총서명의 그림책 시리즈를 독립출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사랑하는 교육자이자 연구자(A/R/Tography)의 한 사람으로서 독서교육과 미술교육의 두 맥락에서 그림책에 대한 유의미한 담론을 이끌어내며, 가치로운 교육적 역할을 실천해내기를 소망합니다.
*홈페이지 교육미술관 통로 http://www.museum-tongr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