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어느 날 둘러보니 크고 작은 스크랩북들이 책장 한 켠을 꽉 채우는 걸 넘어 보조수납장과 박스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을 뿐이다. 내 삶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해 마치 살아 숨쉬는 생명체처럼 나와 함께 몸집이 자라며 나이가 들어가는 스크랩북 컬렉션을 보면, 스크랩북이란 내가 살아낸 시간을 다양한 모습으로 응축한,내 인생과 나라는 사람 자체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성품을 구매하기도, 리폼하기도, 직접 만들기도 하며 차곡차곡 모아온 다양한 종류의 스크랩북. 이런 뭉치가 적어도 네 개는 있으니 나에겐 최소 80권의 스크랩북이 있는 듯하다.
최근에는 '유/청소년기 pt. 1’ 및 ‘Girlhood(소녀시대)’라는 주제로 자그마치 10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천천히 작업해온 (또) 한 권의 스크랩북이 완성됐다. 68번째가 되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기나긴 작업이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뿌듯했지만, 동시에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을 한 챕터가 끝난 것 같은 느낌에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네 개의 국가, 여섯 개의 도시,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은 동네를 넘나들며 지난 내 유년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의 기간 ― 내 인생의 주춧돌과 기둥과 같은 이 시간을 수놓은 소중한 순간들을사진, 그림, 낙서, 메모, 편지, 티켓, 스티커 등의다양한 형태로 풍성히 저장해 기록하는 마법같은 일을 끝맺음해야 할 시간이 왔다니, '시원섭섭'하다는 말의 의미가 이런 감정을 두고 말하는 건가보다 싶었다. 후련함과 서운함이 복잡하게 얽힌 마음을 떨칠 수 없었던 나는오랜 친구를 배웅하는 마음으로 스크랩북을 펼쳐 책장을 차근차근 넘겨갔다.
표지를 직접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실은 선물받은 스크랩북이다. (꽃은? 직접 말려 꽃꽂이 하는 취미가 있다 :3)
스크랩북을 구성하는 것:
불확실성과 예측불가능함에서 오는 투박함
스크랩북을 구성하는 여러 페이지 중에는 앉은 자리에서 뚝딱 완성한 것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금씩 채워나간 것도 있다. 심혈을 기울여 한 부분 한 부분을 색감과 주제에 따라 통일성 있게 꾸민 페이지가 있는가 하면, 단순히 자료를 모아 얼기설기 붙여두기만 한 페이지도 있다.
'한 어미 자식도 아롱이 다롱이'라는 속담처럼, 하나의 스크랩북이지만 각각의 페이지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듯 이 스크랩북의 모든 페이지는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또한 같은 본질을 공유하기도 한다.어떤 페이지도 뚜렷한 계획 없이, 흘러가는 대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 컬렉션의 대다수가 그렇듯 이 스크랩북은 첫 장부터 하나씩, 순서대로 만들어지는 대신 여러 페이지가 조금씩, 동시다발적으로 채워져갔다. 따라서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는 앞을 내다보며 계획할 수 없었다. 물론 페이지가 어느 정도 채워지기 시작하면 나머지가 어떠한 모양으로 완성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질 순 있었지만, 이런 모호한방향설정마저 어디까지나 막연한 바람일 뿐이었다. 앞으로의 일상 속에서 내가 어떠한 일을 겪게 될지알 수 없기에, 내 계획에 들어맞는 색감이나 내용을 가진 자료가 생길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나는 인생이 내게 그 때 그 때 던져주는 자료를 모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재조합해보면서 내가 마음에 그린 이상적인페이지의 모습으로부터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했다― 광활한 바다 가운데 맨몸으로 떨어져 표류하는 가운데, 넘실대는 파도 사이로 보일듯 말듯한 부표를 향해 물살에 떠밀리며 헤엄치듯.이렇듯 어느 부분도 완성된 모습을 그리며 작업하지 않았기에 이 스크랩북에는 어쩌면 ‘예쁘다’는 말보다는 ‘투박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내 시간과 땀이 낳은 자식같은 스크랩북이지만, 군데군데 보이는 삐뚤어졌거나 날려쓴 글씨, 새벽감성이 흠뻑 젖어있다 못해 뚝뚝 묻어나오는 낯부끄러운 글귀, 혹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엉성한 조합은 스크랩북에 대한 나의 편향되고 넘치는 애정으로도 덮여 숨겨지지 않는 거다.
2
투박함이 주는 뜻하지 않은 선물:
불확실하고 예측불가능한 것들의 느린 조화(調和)
그럼에도불구하고내가 만든 이스크랩북에는 오묘한 매력이 있다.
서로 아무 연관 없어보이던 자료들이한데어우러져, 생각지못했으나 그렇기때문에 더 아름다운이야기를하기때문이다.
페이지를 구성하는 각 부분에는 자료를 취득하거나 작업을 하던 당시의 내 생각과 마음상태가 그대로 깃들어있기에, 완성된 페이지 전체를 보면 내 삶의 다양한 순간들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스크랩북을 찬찬히 보다 보면, 각각의 페이지가 채워져가던 중에는 절대 알 수 없던 것들을 알게 된다. 나도 몰랐던 내 그림체나 문체의 특징, 감정상태에 따른 글씨체의 변화, 자료를 배치하는 방식의 패턴 등을 알아차리는 가운데, 이미 알고 있던 내 자신을 확증하는 것을 넘어 내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스크랩북을 보고 나면 마치 낯선 누군가를 소개받은 듯한 느낌에 마음이 따뜻하게 꽉 차오르는 설렘을 느낀다.
각기 다른 순간들에 담긴 각기 다른 생각과 느낌들이 모였는데도 묘한 통일감이 느껴진다. (나만 느껴지나? ㅎㅎ)
이러한 설렘의 원천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크랩북에 투박한 느낌을 주는 바로 그 예측불가능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크랩북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완성된 스크랩북을 볼 때에도 가장 뿌듯한 순간은 자료와 자료,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의 관계 속에서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를 발견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얻은, 서로 동떨어져보이는 자료들의 관계성을 찾으면 페이지가 담을 테마가 생기고, 동시에 페이지를 채워나가다 보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테마가 새롭게 전개된다. 또한 하나의 스크랩북임에도 불구하고 각 페이지는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기에, 다음 장을 펼쳐보기 전까지는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 인생이 그렇듯.
어느 날 문득 시작한 연극수업을 통해 얼떨결에 무대에 오르며
내 억눌린 감정들이자유롭게 피어났듯,
가르치는 일이 계획보다 길어지며 작가로서의 도전은 늦어졌지만
다양한 삶들의 단면을 보며 사람 이해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었듯,
사랑했던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끝없어 보이는 우울의 터널로 이어졌지만
그 터널의 기나긴 암흑을 지나며 내 삶의 빛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게 됐듯.
이와 같이 서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던 사건들 사이에 연결점이 생기며
불확실함이 확실함으로, 불안이 확신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순간,
불필요한 걸 넘어 저주와도 같아보이던 시간들마저 삶이라는 변주곡을 풍부하게 하는 선율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