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기의 천재들>, 앤드루 산텔라
회의 준비, 리포트 작성, 설거지나 빨래, 화분에 물 주기 -
작든 크든 간에 정말 해야 할 그 일만큼은 분명 안 하고 있을 것이다. 혹시 지금 헬스장에 가려고 레깅스까지 입어 놓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알이 빠지도록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지는 않는가?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럴까. 당장 눈 뜨지 않으면 오전 7시 57분 지하철을 놓칠 것이고, 상사에게 한 소리 들게 될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기상을 미룬다. 지금 하지 않으면 파멸할 줄 알면서도 도대체 우리는 왜 미루는 걸까.
- <미루기의 천재들> 중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절대다수의 미루는 인간과 (있다고 전해지는) 미루지 않는 인간. 물론 나는 미루는 인간이다. 시험 기간만 되면 그렇게 책상 정리가 하고 싶고, 리포트는 언제나 새벽 4시쯤에야 겨우 써진다. 회사를 다녀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회의 전에야말로 정주행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대작 웹툰이 나타난다. 최후의 시간, 인터넷 게시판을 딱 10쪽까지만 보려고 하지만, 왠지 11쪽에 엄청난 단초가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어느새 20페이지. 그 사이 시간은 더 흘러, 이젠 정말로 키노트를 켜지 않으면 안 된다. ( 물론 이 모든 것은 여전히 회의 준비의 일환이다!)
대체 우리는 왜 미룰까, 망할 줄 알면서도. 꼭 귀찮은 일만 미루는 것도 아니다. 반드시 득이 될 일도 우리는 미룬다. 당신이 미루고 있는 일 중엔, 당신의 얼굴을 만 원짜리 지폐에 영원히 새기게 해 줄 만한 위대한 일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될지 머릿속에 다 있고, 그저 키보드로 옮겨 치기만 하면 되는 데도 우리는 미루고 만다.
우리는 정말 구제불능 게으름뱅이들인가.
자, 여기 우리가 기다리던 답이 있다. 미루는 행동은 게으름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를 들어 다윈은 <종의 기원> 초안을 내고도, 출판을 미루며 무려 20년 동안 따개비 연구에 골몰했다. 그 자신도
"따개비 연구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을 만한 일이었는지 의문”이라며 고백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죽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며 탄식했는데, 그가 남긴 수많은 아이디어 노트들을 보면 결코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천재들이 특수한 케이스인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장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은 무언가를 미루는 초조함 속에 있을 때다. 그때 책상은 얼마나 멋지게 정리되는가! 그때 다는 댓글 한 줄은 얼마나 재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미루기의 천재들>의 저자이자, 그 자신 미루기 전문가인 앤드루 산텔라의 발견이다. 미루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 합리화에 천재적인 소질을 보이기 마련인데, 앤드루 산텔라는 저널리스트답게 자신의 미루는 행동을 심리적, 역사적, 경제적 등 다양한 층위로 분석해, 이것이 결코 교정의 대상이 아님을 밝혀냈다. 그는 미루기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그는 70여 권이 넘는 출판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A를 미루기 위해 B를 쓰고, B를 미루기 위해 C를 쓰고, C를 쓰기 위해 A를 써낸 결과가 아닐까. 아, 이 아름다운 미루기의 선순환!
- <미루기의 천재들> 중
그렇다. 미루는 인간들은 자기 관리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 미루는 인간들은 미루는 행동을 통해 실패로부터 보호 받는다.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최후의 최후의 최후까지 기다렸기 때문이고, 내가 될대로 돼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공부를 한다고 내일 100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좋은 상황을 좀 더 지속하는 게 그렇게 나쁜 선택일까. 어차피 100점이 아닐 텐데?
다윈도 다빈치도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결과물을 마주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시간을 눈금으로 재기 시작하면서 인류는 초조해졌다. 시간이 눈에 보이니까 가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아아, 시간이 가고 있는데! 이 금 같은 시간이..! 미루는 행동은 죄악시되었고, 이 나쁜 습관의 소유자들은 뿌리부터 고쳐야 하는 계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인생을 살아가는 속도는 저마다 다르다. 같은 눈금으로 계량화 할 수 없다. 시간당 단위 생산성이 좋은 삶의 기준이 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생산하려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살다 보니 아름다운 걸 남기기도 하고 멋지게 실패하기도 하는 뭐 그런 존재들 아닌가.
나는 이 기마상이야말로 미루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벌이는 싸움을 보여주는 기념비라고 생각한다.
참을성을 가질 것. 비록 지금부터 500년이 지난 뒤에라도,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내가 해내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줄지도 모르니까.
- <미루기의 천재들> 중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생전에 완성 못한 청동 기마상의 스케치는 500년 뒤에 끝내 완성됐다. 500년 뒤의 사람들의 손으로.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미루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가능했을까?
미루며 헤매는 동안 일어나는 화학작용이 있다. 그건 매우 아름답다. 미루는 동안 우리의 책상은 깨끗해지고, 우리의 기억엔 새로운 만화가 저장된다. 미루면서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할 힘을 얻었고, 미루고 미룬 끝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낙수장>을 남겼다. 우리는 충분히 미뤄야 한다. 미루면서 넓어지고, 미루면서 깊어지도록.
아직 미루고 있다면 때가 오지 않은 것뿐이다.
그러니 다만, 미루는 자들을 보호하시는
성 엑스페디투스여.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절대 일을 미루지 않는 분이시여,
이 일이 지금 꼭 필요한 일이라면 지금 할 수 있는 분별을 주소서.
*이 글을 미루기 위해 나는 일주일째 미뤄둔 수영복을 빨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