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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Aug 25. 2016

12. 선생 없는 세상의 선생님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선생. 
님이라는 글자 하나 떼어냈을 뿐인데, 참 불경한 느낌이 듭니다.
먼저 태어났다고, 혹은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님'이 되는 건 아닐진대
왜 유독 선생이란 단어는 이렇게 도전적으로 들릴까요.
'님'이 아닌 선생들도 선생이라 부르면 뭔가 죄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
저는 이게 초, 중, 고등학교 십이 년의 정규 교육이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남긴 트라우마라고 생각합니다.


학교가 요구하는 학습 능력은 모자 쓴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수준의 능력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학교 교육의 코드를 알아차리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학생의 생각이나 의문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문제와 대답의 각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토론식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학생이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코드는 토론되는 것이 아니라 규정되는 것이고, 각본에는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 <밤이 선생이다> 중


우리는 각본에 맞춰 '선생이 원하는 대답'을 하는 것을 공부라고 배웠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잘하면 '취업'도 잘되고 '인생'도 풀린다고 배웠습니다. 선생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눈치껏 파악해야 잘된다는 점에서 공부, 취업, 인생은 단어만 다르지 다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선생은 꼭 학교에만 있지 않습니다. 팀장님, 사장님, 선배님, 부모님... 집단에 따라 이름만 달라질 뿐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불행은 그런 선생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학생이 질문하거나 주장하는 걸 바라지 않는 선생들. 그들은 어떤 말을 하든  눈치 보지 않습니다. 좋은 학생이라면 알아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테고, 자신에게 딴죽을 거는 건 학생이 잘못됐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것은 선생의 몫이고 학생은 그저 대답만 하면 되니까요.




옆팀 차장님에게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회식에는 '토크 질량 보존의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최상급자가 일정 분량의 TALK를 채우지 않으면 그 회식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송별회, 환영회, 송년회 등 모임의 목적은 토크량에 변수가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김대리의 송별회라 해도 최상급자 박 부장이 그 날의 토크 분량을 채우지 못했다면, 김대리의 마음이야 어찌 됐든 그 자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1차에서 박 부장이 말을 많이 못했다면 2차로, 2차에서도 부족했다면 3차로 - 박 부장이 하고 싶은 만큼 토크를 끝낸 뒤에야 회식도 함께 끝납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1차에서 모든 토크량이 채워지면 앉은자리에서 바로 회식이 끝나는 기적도 가능합니다만, 저는 여태까지 그런 회식은 딱 한번 겪어봤습니다.


말 많은 가짜 선생들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내 앞에 앉아있는 후배가 억지로 끌려왔을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멘토 역할에 몰입을 해버려서, 이런저런 개인사를 늘어놓으며 인생 교과서를 집필하십니다. 혹여 후배가 어쩌다 고민이라도 털어놓으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멘토는 더더욱 감정이 고조됩니다.
'내가 다 겪어봐서 아는데, 그런 거 다 부질없다. 그저 돈이 최고야. 괜히 실패할 필요 뭐 있어. 내가 그렇게 못산게 후회돼서 하는 말이야.'

자기도 하지 못한 걸 술기운에 충고랍시고 쉽게 떠벌리는 건, 좋게 봐줘도 주책 아니 그냥 꼴불견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가 술은 좋아해도 회식은 싫어하는 이유죠.


성장통과 실패담은 다르다. 두 번 다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늘 다시 시작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아름답고 거룩한 일에 제힘을 다 바쳐 실패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 일에 뛰어드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다. 그 실패담이 제 능력을 극한까지 발휘하였다는 승리의 서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밤이 선생이다> 중


자신의 고민을 쉽게 털어놓는 만큼 남의 도전 또한 쉽게 말리는 사람. 그분들의 말이 더 듣기 곤란한 건 진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차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 온 힘 바쳐 치열하게 싸워 본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을. 내 고민을 나만큼 아프게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그냥 선생 노릇하고 싶어서 떠들어댈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대개 술자리의 가르침이란, 그 말이 끝난 뒤에야 집에 갈 수 있단 점에서 듣기 평가 혹은 인내심 테스트에 불과합니다.

뭐 그래도 위의 경우는 나은 편입니다. 적어도 자신의 이야기를 했거나, 후배의 고민을 들어주기는 한 것이니까요. 자칫 대화가 '나 요새 무슨 책 읽는다, 무슨 영화 봤다'는 식의 교양 뽐내기로 돌입하면 사태는 더 걷잡을 수 없습니다.


영화에서건 번역에서건 '문학적'인 것들은 항상 달콤하게 속삭인다. 이게 무언지 알고 있지요, 당신 참 똑똑합니다, 그것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첨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기는 영화를 감독하거나 책을 번역하는 일보다 더 힘들다.

- <밤이 선생이다> 중


와 어떻게 팀장님은 그런 걸 다 아세요, 요란스러운 리액션도 한두 번이죠.  유명한 영화 전문가의 리뷰를 그대로 읊는 것에 불과한 감상을 듣다 보면 고기를 굽다가도 잠이 옵니다. 상징성... 맥거핀... 리얼리즘.. 스토리.. 아 어디까지 들었더라? 집에 언제 가냐.... 무엇보다 저를 더 괴롭게 하는 건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의 비겁함입니다. 이미 자신만의 시선을 잃어버린 사람이 권위자의 힘을 빌려 자신을 드높이고자 하는 그 나약함이요.

이들도 한때는 꼰대를 저주하며 눈을 빛내던 젊은이들이었을텐데 왜 다 이렇게 된 걸까요.

후배들의 휴가 여행지나 새로 하고 온 아이템은 득달같이 알아보고 지적해도, 자신만의 이야기는 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할까요. 먼저 돈을 벌기 시작한 만큼, 그간 쌓인 돈만큼 나태해지는 건 당연한 걸까요.


권태롭다는 것은 삶이 그 의미의 줄기를 얻지 못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이다. 유행에 기민한 감각은 사물에 대한 진정한 감수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 <밤이 선생이다> 중


솔직하기나 하면 다행일 텐데 그래도 나, 돈은 있다고 신상 구두 신은 발을 슬쩍 내밀어보일 때면 눈뜨고 못 봐줄 지경이 됩니다.


아, 뭐 다 좋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야 있겠습니까. 세상살이 힘든데 선생 노릇 해서라도 부족한 자존감이 채워진다면 다행이죠. 그렇더라도 그들의 선생 놀이에 장단을 맞춰 그들을  선생님으로 대우하면 큰일 납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구도 정말 중요한 인생의 질문에 대해선 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월호처럼 막막하고 큰 사건 앞에서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고 물을 때,

매일 슬퍼하며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사는 것도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을 때,
모두가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는 세상에서 내 아이만 조기교육을 막는 게 정말 아이를 위한 선택이 맞는지 모르겠다고 물을 때,

골목이란 골목은 모두 재개발하고, 산이란 산은 다 깎아내면서도 

돌아서면 사회가 미쳐 돌아간다고 욕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냐고 물을 때
정말이지 이런 때 도움되는 답을 해주는 선생님은 주변에 없습니다.




우리가 선생님에 바라는 건 이런 것 아닐까요.


때론 지친 학생들의 마음을 헤아려 독려하고,
 

실은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 유례없는 경쟁사회에서 우리는 조금씩 지쳐있다. 그렇더라도 마음이 무거워져야 할 때 그 무거운 마음을 나누어 짊어지는 것도 우리의 의무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듯이, 나라 잃은 백성이 독립운동하듯이.

- <밤이 선생이다> 중


쉽게 남을 비난하고 싶을 때 더 큰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주고,


썰물 때 드러난 개펄을 보고 "저게 논이라면"이라고 말했던 사람들과 망가진 삼학도를 원통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사실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변덕을 말할 수는 없다. 한 시절, 이 나라의 두뇌가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전망이 그것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이 삼학도를 파괴하는 일에 동참했다기보다는 가난의 볼모로 잡혀 동원되었을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밤이 선생이다> 중


누구의 격도 함부로 떨어뜨리지 않으며


"이 도자기들은 고려의 도공들이 억압 속에서 노예적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으며, 차라리 증오해야 할 물건들"이라고 그 젊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단언했던 것이다. 도공들이 뼈저린 고통 속에 살았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들의 신분은 비천했으며 그들의 작업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제 손목을 자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비록 노예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이룩한 작업의 가치를 그 생산제도의 성격으로만 따질 수 있을까.
도공들이 그 아름다운 그릇들을 억압과 고통 속에서, 원한과 분노 속에서 만들었지만, 도공들은 또한 그 도자기를 통해 자기 재능을 실현하고, 자기가 살고 싶은 세계에 대해 그 나름의 개념을 얻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소망이 없었다면 도공들은 그 아름다움을 어디서 끌어왔겠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우리의 소망이 아닐 것인가. 교사는 도공들의 편에 서서 말한 것이 아니라 도공들을 모욕한 것이다.

- <밤이 선생이다> 중


가르쳐야 할 때는 따끔하게 가르쳐주는 것


그래서 나는 요즘 대학생들의 편에서 박정희를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들으면
저 우체국 창구를 뛰어넘을 때와 같은 충동을 다시 느낀다. 학생들의 입장에서라면, 한 때의 압제와 불의는 세월의 강 저편으로 물러나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으니, 그렇게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경제적 성과를 두 손으로 거머쥐기만 하면 그만일 것이다. 과거는 바로 그렇게 착취당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눈 앞의 보자기만 한 시간이 현재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선 시대에 노비들이 당했던 고통도 현재다. 미학적이건 정치적이건 한 사람이 지닌 감수성의 질은 그 사람의 현재가 얼마나 두터우냐에 따라 가름될 것만 같다.

- <밤이 선생이다> 중


선생으로서 갖춰야하는 최소한의 책임은 이런 게 아닐까요.


아이는 더 편한 길을 놔두고 눈이 쓸리다 남아 있는 길 한가운데 고르지 않은 땅을 밟고 있다.
그래서 어른과 아이의 거리가 더 멀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어머니와 아들일 것이 분명하다.
 ~ 아이는 어른이 걱정하는 것만큼 눈이 두렵지 않다.
이 겨울을 어른은 어른만큼 책임지며, 아이는 덜 책임지며 걸어오고 있다.

- <밤이 선생이다> 중


선생이 '님'이라 불리는 순간, 그에겐 일반 사람보다 더 멀리, 더 깊이 보아야 할 책임이 생깁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들을 거라 믿기에 우리는 그들에게 '님'이라는 가치를 부여했던 겁니다. 그래서 제게 선생님은 제가 졸라서라도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도덕은 그 자체가 폭력이다.

- <밤이 선생이다> 중


이런 말씀을 하는 분을 만나면 납죽 엎드리며 스승님, 저를 제자로 거두어주십시오 청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이런 이야기라면 밤새서라도 그분의 말을 들을 겁니다. 회식, 제가 먼저 하자고 할 겁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건 더 높은 세상으로 가는 비행기를 얻어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분만큼 인생을 더 살지 않아도, 그분이 지나온 세월을 덤으로 느껴보는 거니까요.




참으로 선생 없는 시절입니다. 회사에 들어와서 가장 실망한 것은 십 년 뒤에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 하는 목표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먼저 가본 사람 중에 본받고 싶은 사람이 이다지도 없다니, 저와 동기들은 낙담했습니다.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보낼 텐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선생님이 없으니 자극도 없다.


그러나 영리한 친구 하나가 말했습니다.

주변에 선생님이 없다고 슬퍼말고 배울 사람들을 찾자.
그리고 저는 이 책을 찾았습니다.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1. 주변에 배울만한 사람이 없을 때

2. 쉬운 말로 혼나고 싶을 때

3. 세상만사 답답하고 짜증날 때

4. 사이다같은, 그러나 잘쓴 글을 읽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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