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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Aug 20. 2016

11. 진보는 실패한다

<한낮의 어둠>, 아서 쾨슬러



저는 온 인생을 통해 쪽팔리지 않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쪽을 팔아본 결과 쪽팔리지 않는 법이란 매우 간단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는다. 이 한 문장이었습니다.
연애 고민을 털어놓은 친구 앞에서 그녀 남친의 심리상태와 관계 양상을 예측하지 않을 것이고,
문학, 영화, 정치-다종 다양한 딥토크에서 손톱만큼 알고 있는 지식을
한 움큼으로 불려서 말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술을 끊으면 저런 짓을 할 확률이 굉장히 작아진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이 끝나면 저는 쪽팔릴 예정입니다.
지금부터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쓸 거니까요.


"그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는 통치할 수 없다", 생쥐스트

- <한낮의 어둠> 중


통치, 이 얼마나 무겁고 현란한 말입니까.
똑같이 다스린다는 뜻을 가져도 정치보다 통치는 느낌이 좀 별로입니다. 통치는 거느릴 통(統) 자를 쓰고 정치는 정사 정(政) 자를 쓰는데요, 그렇다면 두 단어의 온도차는 바를 정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통치는 밑에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며 다스리는 것이고, 정치는 바르게 세상을 보고자 애쓰는 느낌인 거죠.
남들을 거느리려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통치에는 필연적으로 죄가 따른다고 저 유명한 프랑스의 정치가는 말했나 봅니다.


국가에 소속된 우리들은 강하거나 약하거나 통치의 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통치가 정치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선거를 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선거권을 취득한 지 이제 만 십 년이 되어 가는데 여러 번의 선거를 거치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이른바 진보세력에 대한 것입니다.




최근 몇 년간 깨시민이라는 단어가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깨어있는 시민의 준말인데 그리 좋은 뜻은 아닙니다.
자신만 깨어있고 남들은 무지몽매하다고 보는 오만한 진보주의자들을 비아냥거리는 말이죠.
이 단어야말로 오늘날 진보진영에 내리는 일반 시민들의 정의,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보수는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는 사람들이고, 진보는 그 질서를 바꾸려는 사람들입니다.
보수진영은 자신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권력을 잡고 있을 땐 이 위치를 빼앗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다고 전제하고 대비하는 게 합리적이죠.
그래서 보수진영의 화법은 오히려 부드러운 데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어르고 달래요.
우리 너네한테 나쁘지 않아.


그런데 진보는 가르칩니다. 자신이 있는 겁니다.

진보는 언제나 싸우는 사람들이고, 현재의 잘못된 정의를 바로 잡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를 공격하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보라는 낙인 때문에 드러내놓고 말은 못 하지만 그들도 분명 우리의 편이다.
몰라서 그렇지, 우리가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알면 반드시 우리들의 편이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진보는 항상 대중에 배신당합니다. 그리고 그런 배신을 전혀 생각도 못한 듯 화들짝 놀라 외치죠.
아니, 당신이 부자입니까? 우리가 아니면 당신의 뒤를 봐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왜 우리 편을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정의란 말입니다!


"지금은 병든 세기야. 우린 질병의 원인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정확하게 진단했지만, 치료용 칼을 들이댈 때마다 새로운 종기가 나타났어. 우리의 의지는 단단하고 순수했지. 당연히 인민으로부터 사랑받아야 했어. 그러나 그들은 우릴 증오했지. 우린 왜 그렇게 미움을 받게 되었을까?"
  그는 잠시 중단했다가 다시 중얼거렸다.
"우린 당신들에게 진리를 가져다주었지. 하지만 우리 입을 통해 나오는 진리는 거짓처럼 들렸어. 우린 당신들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지. 그러나 우리 손에 있는 자유는 채찍처럼 보였어. 우린 당신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었어. 하지만 우리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선 나무가 시들고 나뭇잎이 떨어졌지. 우린 당신들에게 미래를 가져다주었어. 하지만 우리의 혀는 더듬거리며 짖는 듯 고함쳤지...."

- <한낮의 어둠> 중


왜 진보는 그토록 자신들의 정의에 자신이 있는 걸까요?
제가 발견한 진보의 재미있는 특성은 이것입니다.

'스스로 진보주의자라고 밝히는 사람일수록 전체주의자처럼 군다'


저는 여기서 '진보주의자'라고 쓰지 않고 '진보주의자라고 밝히는'이라고 썼습니다. '밝히는'이라는 단어를 '드러내는' '자랑하는'이라고 바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논쟁적인 상황에 너무나 쉽게 자신의 정체성부터 밝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실은 좌판데요'라고 의견보다 깃발을 먼저 들이미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전체주의자'스러웠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명박을 옹호할 수 있죠?
아니, 어떻게 새누리당을 찍을 수 있죠?
아니, 어떻게 일베 폐쇄를 긍정하지 않을 수 있죠?


그들에겐 세상이 너무 쉽게 반으로 나뉩니다. 우리 편과 우리 아닌 덜 떨어진 놈들로.
그들에겐 진리도 쉽습니다. 진리가 쉬운 만큼,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쉽게 비난합니다.

자연히, 덜 떨어진 놈들의 의견은 없애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저는 이런 대화들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봅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한 사람들이 왜 그렇듯 독재와 전체주의 집단으로 바뀌었을까에 대한 의문.
그건 그들이 '정의의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중에게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주는 초인으로서, 그들의 태생이 소수였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은 정당방위였고 또한 정의의 편이기 때문에 회의는 없습니다.
인터넷 전체주의자들의 생각은 실질적인 물리력은 행사하지 못하더라도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이 나타나면 차단하고, 폐쇄해버리려 하는 점에서 저 망한 국가들만큼이나 위험합니다.


"이런 도취감을 조심하게. 독한 술에는 모두 일정한 양의 도취감이 들어 있지.
그러나 불행히도 모욕과 고통의 도취감은 화학적으로 야기된 도취감만큼이나
싸구려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네." 

- <한낮의 어둠> 중


<한낮의 어둠>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를 그린 소설입니다.  '당 정보부' 수뇌로 활동하던 루바쇼프가 역으로 수감되어 처형당하기까지 겪는 이야기가 핵심입니다. 위에 인용한 말은 루바쇼프를 회유할 때 당간부가 한 말입니다.


사람들은 희생과 정의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 희생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올바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서가 완전히 뒤집힌 말이죠.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 희생을 할 수는 있어도, 모든 희생이 가치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쓸모없는 일에 고통을 당하면서, 네가 지금 대단한 희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 책 속의 당 간부는 그런 도취감을 꼬집은 것입니다.


소설가 박민규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콤플렉스인데, 제 할아버지만 해도 이북 분이거든요. 친구 분들이 모이시면 일본에 징용 갔던 일이며 만주에서 마적떼랑 어울렸던 일 등,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아버지 친구분들도 학도병으로 전쟁을 치르고 월남에도 갔다 오셨죠. 제 또래는 딱히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제 아들은 더하겠지요. 어느 날 문득 보니 대부분의 인간들이 너무나 마이크로해지고 소프트해진 거예요. 초지배적인 인간형이 되어가고 있는 거죠.

- <지구영웅전설> 수록 인터뷰


모든 사람이 투쟁에 참여하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지금 인터넷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어떤 집단행동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겪어본 가장 큰 역사적 행동은 2002년 월드컵 거리 응원입니다. 그때 우리는 뭔가 해냈다고 느꼈습니다. 그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죠.

그래서 우리는 더 경계해야 합니다. 촛불 하나 켜면서, 꽃 한 송이 갖다 바치면서, 네이버 기사에 댓글 하나 달면서 대단한 일을 한다고 느끼는 도취감을 말입니다. 지금 내가 역사를 바꾸고 있다는 느낌.


도취감에 취한 사람들은 양 옆을 돌아보기가 힘듭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가로 경쟁하는 게 아니라 도취감으로 대결을 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누가 더 자신들의 행동에 취할 수 있나. 누가누가 더 많은 사람들을 공범으로 만드는가.


"내 요점은 이 세상을 감정을 풀기 위한 어떤 형이상학적 사창굴로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일세.
이게 우리의 첫 계율이야. ~ 신의 유혹은 늘 사탄의 유혹보다 인류에게 더 위험했네.
혼란이 세상을 지배하는 한 신은 하나의 시대착오네. 그리고 자기 양심과의 모든 타협은 배반이지."

- <한낮의 어둠> 중


인터넷에선 항상 진보적인 의견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왜 항상 선거에서는 질까.

그리고 왜 세상은 바뀌지 않을까.

제가 느끼는 위화감은 이런 것입니다.
소위 진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이나 페북에 관련 메시지나 사진을 올리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렇게 똑똑하고 사회인식을 잘 한다. 나는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하다. 일종의 액세서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포스팅은 본인의 실제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기 때문에, 패션 좌파, 강남좌파, 깨시민 같은 비아냥은 단어만 달리해서 계속 존재해왔습니다.


한편 이른바 젊은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부끄러워합니다. 젊은 나이에 갖춘 보수적인 생각이 떳떳지 못하거나, 혹은 그걸 내보이기가 귀찮은 겁니다. 지적당하기 쉬운 만큼 그들은 의견을 숨깁니다.

그리고 둘 다 투표장에 갑니다. 진보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표는 똑같이 한 표입니다.


"물론이지. 언젠가 한 수학자가 말하길, 대수학은 게으른 사람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더군.
x를 풀지 않고서도 마치 아는 듯 조작하기 때문이라네. 우리의 경우, x는 익명의 대중, 즉 인민을 상징하지. 정치란 x의 실제적 본질을 생각하지 않은 채 x로 작업하는 걸 의미하네."

- <한낮의 어둠> 중


진보주의자들은 의외로 수학적인 사고를 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중이 어떤 '감정'과 '생각'과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그들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또 하나의 흙수저를 추가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겪어보지 않은 채, 단순히 세상엔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많으니 진보당이 승리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 = 진보의 편, 이런 산술적인 생각이죠.

대중 개개인의 개성을 생각하지 않으니 그들에게 대중은 항상 X입니다. 그래서 대중을 설득하는 그들의 말은 항상 어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진보주의자가 될 수 있는 건 많이 배웠기 때문입니다. 진보주의자들이 똑똑하다는 게 아닙니다. 돈이 많아야 대학원도 가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인지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잘 모릅니다.

보편성, 당위성, 타자화, 소외, -이즘, 이런 말이 한 문장에 세 번 네 번씩 등장하면 사람들은 글쓴이가 뭘 비판하는지 보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메스꺼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 사람이 지금 복잡한 말로 나를 가르치려 든다 본능적으로 아는 겁니다. 그에 비하면 재개발, 일자리 해결, 강남 3구 특구화는 얼마나 알기 쉽나요.


익명의 대중을 개돼지로 바라보는 것은 고위급 공무원뿐이 아닙니다. 진보주의자들에게도 대중은 개돼지입니다.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그저 먹이만 주면 꿀꿀대며 만족하는 짐승들. 그리하여 '계몽'시켜야 하는 대상.

그래서 몇몇 진보주의자들은 아둔한 인민들을 거느리고 싶은, 꼭 통치하고 싶은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방정식에서 x가 차지하는 의미로서의 x를 인식한다는 것이지."

- <한낮의 어둠> 중


사람들이 정말 뭘 몰라서, 단순히 덜 떨어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지 못하고 보수당을 찍는 걸까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널리 보지 못하고 당장 오늘을 생각하며 판단합니다. 다음 세대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하지 않을 결정을 오늘은 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특징은 아닙니다. 인간은 대개 그렇습니다.


사실 누가 뽑히든 우리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이들의 편을 들 겁니다.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우리 동네 국회의원을 찍는 사람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간단한 과정이라 여겼지만,
실은 수세기에 걸쳐 측정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것이다.
유럽의 인민들은 아직도 증기 기관의 결과를 정신적으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제도가 무너진 뒤에야 대중은 그 제도를 이해할 것이다. 

- <한낮의 어둠> 중


우리들은 아직 '자본주의'에 대해서 배우는 중입니다. 이 나라에 이 체제가 들어온 지 아직 백 년도 안 지났습니다. 자유 경쟁의 논리가 무엇까지 허용하는지 우리는 아직 모르고 무상급식과 북한을 거리낌 없이 비교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직 자본주의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그 어떤 제도를 욱여넣은들 사람들은 뱉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직 이가 안 난 아기에게 갈빗대를 쥐어주면서, 이렇게 좋은 걸 왜 못 먹냐고 다그칠 순 없는 겁니다.
고기를 주는 사람이 잘못된 거죠.


마케팅에서는 타깃 소비자를 잘 파악하는 것이 캠페인 성공의 열쇠가 됩니다.
소비자 파악을 한다고 2030 여자, 3040 남자로 단순하게 가르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타깃 집단의 공통된 속성, 이를테면 어린 시절에 세일러문을 보고 자랐다, 그들이 고등학생 땐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 하는 사회 맥락적인 것들을 포함해야 그나마 성공 언저리라도 가봅니다.

그렇습니다, 로션 하나를 팔아도 그렇게 연구한 뒤에야 마케팅에 돈을 씁니다.

그런데 하물며 정치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사람들은 왜 그렇듯 쉽게 대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당 활동은 목표를 향해 태연히 굴러갔고, 지나는 길의 굽이에서 익사자가 생기면 그 시체를 치워 버렸다.
그 경로에는 많은 굴곡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당 활동의 존재 법칙이었다.
굽은 경로를 따르지 못하면, 누구라도 물에 휩쓸려 둑으로 밀려났다.
~ 당은 한 가지 죄, 곧 계획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만 알았다

- <한낮의 어둠> 중


왜 달리는지 무엇을 싣고 달리는지 알지 못하고 달리는 기차는 위험합니다. 타고 있는 사람들도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두렵고, 기차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언제든 치여 죽을 수 있는 재앙이 될 뿐입니다.

제 눈엔 최근의 몇몇 사회이슈들이 왜 달리는지 알지 못한 채 그냥 달리기 위해 달리는 기차들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좀 더 민주주의의 이점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이면 좋겠습니다. 더 많은 의견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의견을 올리면 끝이 아니라 거기 쓰인 댓글들과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sns에 '소통'이라는 단어가 넘쳐나는 것이 '소통'되지 않는 우리들에 대한 방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자네들 뒤에 아직도 대중이 있다고 믿는가? 사람들이 체념한 채 자네들을 견디고 있는 걸세.
다른 나라 사람들이 견디고 있듯이. 그러나 저 밑바닥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지.
대중은 다시 귀먹은 벙어리가 된 거야. 역사는 배를 실어 나르는 바다처럼 무심하네.
스쳐가는 빛이 표면을 비추지만, 그 아래는 어둠과 침묵뿐이지. 우리는 오래전에 그 밑바닥을 건드렸네.
그러나 그건 끝났어.
~ 그 당시 우리는 역사를 만들었네. 지금 자네들은 정치를 하고 있고. 그것이 차이야.


이런 인용은 지나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는 오늘날 프로 의식꾼들에게서 이런 인상을 받을 뿐입니다. 너무 쉽게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이 좀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그들이 그들의 패배에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고 싶지도 않습니다. 왜 지는지 너무나 알 것 같으니까요. 자신들만의 대화 안에서 도취감에 취해있는 한 진보가 이기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수학적 단위가 인간일 때 2 곱하기 2는 4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지...."
"증기 기관이 발명된 이래 세계는 줄곧 비정상적인 상태였네. "

- <한낮의 어둠> 중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인데 왜 소설을 읽느냐고 묻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거침없이 이 책을 읽어보라 했습니다. 사실 책 한권만 읽은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데요, 제가 그렇습니다. 저는 볼셰비키니, 레닌이니, 사회주의니, 정치니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그것들에 대한 윤곽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왜 동구 체제들이 그런 모습으로 무너졌는지, 그로부터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진보세력은 왜 항상 사생아 취급을 받는지에 대해서. 우리들이 지닌 특수한 이력은 둘째 치더라도 왜 이렇게까지 진보적 논의는 터부시 되고, 또한 터부시 되는 만큼 진보가 자랑스러운 해시태그가 되는지에 대해서.

꼭 어려운 사회학 개론서를 읽어야만 사회를 아는 건 아닙니다. 잘 쓴 소설 하나는 철학, 역사, 이념, 문학을 모두 담고 있으니까요.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1. 사회주의가 궁금하다면

2. 잘 쓴 정치소설이 읽고 싶다면

3. 소설의 가치를 잘 모르겠다면

4. 진보주의자라면

5. 보수주의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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