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태어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났고, 태어났기에 살아가게 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실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누구고,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내가 보고 있는 이 세상은 누가 왜 만들었는가. 철학은 이런 질문들에 답을 구하기 위해 시작된 학문일 겁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철학자가 소설을 쓰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요?
그래서 읽어봤습니다. 그건, 몇십 년 동안 고어를 가르치던 남자가 리스본으로 그냥 떠나버리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주 어렵고 외롭고 안타깝고 복잡한 내용인데, 그 모든 게 내 이야기기도 해서 너무나 쉽게 읽어버렸어요. 나도 그래, 나도, 읽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쏟아지는 그런 책이었죠.
다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쉽게 쓰이지만 나를 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나'라는 존재를 알까요? 보통은 눈으로 확인할 겁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며, 쇼윈도에 비친 내 실루엣을 보며 여기 내가 있다는 걸 확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무언가 보고 있다'는 사실로 스스로 존재함을 믿습니다. 영어로 eye와 I는 같은 소리가 나고 한자어 눈 목(目) 자와 스스로 자(自) 자는 형태가 비슷하죠. 저는 이것들이 결코 우연만은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눈을 통해 자신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눈이 머리통 앞쪽에 붙어있다는 겁니다. 이런 눈으론 뒤를 보거나, 자신을 쳐다볼 수 없습니다. 무언가 비춰볼 것이 없으면, 아무리 눈이 있어도 스스로를 볼 수 없죠.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자신을 볼 수 없는 존재. 거울이나,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 매일 걷고 다니는 길과 다니는 직장을 통해서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존재. 바깥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는 존재.
눈에 대한 감각으로 인간을 정의하면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인간은 스스로 완결될 수 없다.
이런 섣부른 결론으로 생각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를 결정하는 건 대체 누구일까요. 나일까요? 남일까요?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남들이 무심코 내게 내린 평가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던 적이 모두들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어?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너 되게 착하더라", "너는 좀 반골 기질이 있는 것 같아"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그런 말을 들으면 썩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릴 권한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게서 어떤 면을 보았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그게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그럼 그런 말에 반발해서 내가 속으로 생각하는 나에 대한 평은 얼마나 진실일까요. 정말로 나 스스로의 생각일까요?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 대해 하는 말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 가운데 어떤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 다른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말처럼 확실한가? 스스로의 말이라는 것이 맞기는 할까? 자기 자신에 대해 사람들은 신빙성이 있을까?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저는 한 때 '착하다'는 말에 집착했었습니다. 도움을 청한 친구의 부탁을 싫어도 들어주고, 먹고 싶지 않은 메뉴를 친구를 위해 함께 먹어주고, 내가 너무 피곤해도 친구 집까지 바래다주고. 뭐 그밖에 모금함이나 지하철역에서 돈을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줘버리고 정작 나는 걸어온 적도 많았죠. 그게 착한 거고, 그렇게 살아야 나중에 복 받는 줄 알았어요. 무엇보다 남들이 착하다고 할 때 기뻤거든요. 아, 그래 나는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건 나중의 나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나에겐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나도 실은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데, 왜 항상 다른 사람이 하자는 대로 해야 되는 걸까. 좀 지쳤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의 부탁을 조금씩 거절해봤어요. 친구들은 저에게 섭섭함을 느꼈죠.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몇몇이 불평했습니다.
"너 나빠, 우리랑 같이 수업 안 듣고"
"00이는 진짜 착한데. 뭐 하자고 하면 다 해줘, 좀 무리한 부탁이라 해도."
"맞아, 나 같음 기분 나쁠 텐데, 화도 안내."
"00 이가 화내는 거 난 본 적 없어."
이 대화를 듣는 순간에야 저는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드디어 한 거죠. 착하다는 건 그렇게 고결하거나 가치 있는 단어가 아니었던 겁니다. 무리한 부탁도 들어주고, 설령 짜증이 나더라도 화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친구사이에선 말이죠. 그 이후론 더 적극적으로 '나빠지기로' 결심했고 친구들은 제가 변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 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 봐 대항하는 투쟁 문구의 일종인가?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그러니까 '착하다'는 말은 온전히 저의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저 스스로를 착하다고 소개하고 싶었던 것뿐, 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왜 그토록 착하다는 말을 포기하기가 어려웠던 걸까요.
다른 사람들이 존경과 인정을 거두어가면, 왜 우린 그들에게 '그런 건 필요 없소. 나 자신만으로도 충분하니까'라고 말하지 못하나? 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건, 소름 끼치는 속박의 한 형태가 아닐까?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는 건 아닌가? 이런 일을 견디는 댐이나 보루로 어떤 감정을 세워야 하나? 내적인 견실함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저는 자기소개 시간을 싫어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나이와 이름을 간신히 대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기 때문이죠. 앞서 말한 것처럼 저는 착한 면도, 나쁜 면도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친구들과 있을 땐 아주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지만, 또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땐 조용하고 내향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기분도 그렇습니다. 어떤 날은 굉장히 쉽게 행복해지고 누구보다 시끄럽게 웃을 수 있지만, 또 다른 날엔 좀처럼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자기소개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듣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잘하는 게 뭔지, 내 성격이 어떤지 딱 하나씩, 빨리, 최대한 알기 쉽게 내놓아야 하죠. 그러나 그렇게 소개된 건 저의 일부분일 뿐 저는 아닙니다. '나에 대해 표현한 말이 내가 되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소개 시간에 말하는 단어 하나하나는 너무 중요하고 무거운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로만 자기를 결정합니다.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하지만 우리의 말은 우리를 정확하게 담지 못합니다. 감정이나 생각의 촘촘한 눈금을 단어수가 따라가지 못합니다. 남들이 저를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족한 말들 속에서 '나'는 어떻게 되는 건지가 전 너무 무서웠습니다.
말의 이런 폐해 중에 가장 강력한 건 이름일 겁니다. 어떤 사람을 그 사람으로 만드는 수많은 것. 나이, 성별, 꿈, 학교, 직장, 생김새, 성격, 취미.... 그중에서도 이름만큼 짧고 강력한 건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름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이름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 불러주어야 의미 있는 것이고, 부모가 물려주는 것입니다. 별명도 그렇습니다. 별명은 남들이 지어 부르는 것이지, 내가 직접 만든 별명은 나의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이름은 그 자체로 한계가 되기도 합니다. 볼펜 한 자루를 생각해봅시다. 볼펜은 종이에 뭔가 쓸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볼펜이라는 이름은 아주 짧고 정확하게 그런 속성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게 볼펜의 전부는 아닙니다. 볼펜으로 꼭 글씨만 쓰란 법은 없으니까요. 구멍을 뚫거나 코를 파거나, 가볍게 딸각거리는 게 기분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죠. 하지만 볼펜이라는 이름은 그 모든 걸 담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이름도 그렇습니다. 이름에는 나에 대한 남들의 생각이 덧입혀집니다.
아, 영희? 영희 착하지. 철수? 그 의사 말하는 거지?
스스로 정한 한계, 자기 이름을 발음할 때의 느림과 무거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만들어진 자화상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그래서 우리는 불리기 싫은 이름이나 별명으로 불려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름에 대한 호오를 미처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려 왔기 때문에 남들이 부르는 내 이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죠.
이 책의 주인공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책 속에 파묻혀 이미 죽어버린 언어들만을 답습하는 고루한 선생님. 그의 별명은 문두스였습니다. 문두스는 라틴어로 세상, 우주를 뜻하는데 그만큼 똑똑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공부를 좋아하고, 잘 정돈된 책 속의 언어들을 사랑했습니다. 월등한 수업능력과 수학능력. 그러나 그건 그의 일부분일 뿐, 그 인생의 수많은 갈래 중엔 시장통에서 돈을 훔쳐 달아난 소년이 있기도 했습니다.
조용한 고어들을 그 무엇보다도 더 숭배하며 사랑하는 소년이 아니라, 그때 돈 상자에서 돈을 꺼냈던 그 소년이 자기 인생을 결정했더라면 그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우리 안에는 수많은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우리를 우리가 다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과거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그 생각이 어떻게 변했고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려고 하는 것도 삶의 완전함 - 그런 게 만약 있다면-에 속한다.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사실 세상엔 자신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스스로의 과거와 경험을 쉽게 단정 짓고 설명하며, 다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나'에 만족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PR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표현한 단어 몇 가지로 나를 설명해도 충분하다고 믿으니까요. 사람들은 그런 이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그들의 책을 사고, 그들을 따라 하려 합니다.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과연 나를 무엇이라 불러도 좋을지 깊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순진하다고 합니다. 너도 빨리 너를 팔아봐, 그래야 뭐라도 되지.
우린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 몽테뉴, 수상록 제2권 1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하지만 저는 끈덕지게 저한테 물어보고 싶습니다. 내 속에 또 뭐가 있는지, 최대한 더 많은 나를 경험하고 그런 후에야 나에 대해서 말을 하고 싶습니다. 항상 규칙적으로 집을 나와 학교를 향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그야말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냥 떠나버린 것처럼. 자신의 뼈대를 만든 추운 도시를 벗어나 남국의 도시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 것처럼.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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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다.
-<리스본행 야간 열차> 중
지금 당신은 어떤 당신을 경험하고 있나요. 그리고 어떤 당신을 상상하고 있나요. 당신은 누구인가요.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1. 나에 대해 알고 싶은 분
2. 이국적인 멋진 소설을 읽고 싶은 분
3. 이소라의 TRACK 9을 좋아했다면
4. 막연히 리스본이 좋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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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소라의 TRACK9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나는 알지도 못한 채 태어나 날 만났고 / 내가 짓지도 않은 이 이름으로 불렸네
걷고 말하고 배우고 난 후로 난 좀 변했고 / 나대로 가고 멈추고 풀었네 - TRACK 9, 이소라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노래로 만들면 이런 가사가 쓰였을 것 같죠.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저 먼 나라의 철학자와 이소라가 소름 끼치도록 똑같은 말을 했을 때, 문화권을 넘어서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과, 비슷한 이유로 슬퍼하며 살아간다는 걸 발견할 때 저는 글 읽는 기쁨을 느낍니다. 불완전한 언어를 조금 더 잘 써보고 싶다는 욕심을 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