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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Aug 11. 2016

09.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_
비종교인의 예수 읽기

<예수전>, 김규항



여기 오래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천 년의 시간을 거치며 이야기에는 살이 붙었고 흘러간 시간만큼이나 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이하게, 이야기의 뼈대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하며 수고로운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세상의 절반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그 반대편에는 신의 이름을 빌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은총으로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얻었습니다. 좋은 머리,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몸. 신의 축복을 말하는 이들에게 세상의 과반인 수고롭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울며 엎드렸습니다.

 “우리를 구하소서. 신이시여.”

그리고 홀연히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의 편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하였으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의 곁에 머물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다독이며 그는 어설픈 몸짓으로, 서투른 손짓으로 어떤 말을 쓰기 시작합니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나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복되어라, 지금 우는 사람들! 그대들은 웃게 되리니.(루가 6:20~21)”

-<예수전> 중


이 말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획기적인 전환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말,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빈자(貧者)들의 것이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화를 냈고 누군가는 그 말을 오해했습니다. 화를 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해했고, 그 말을 오해한 사람들은 가난을 잘못 알았습니다.


이야기는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끊긴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 이야기의 결론부도 도입부도 절정부도 아닙니다. 우리는 늘 이야기의 한 중간에 있으나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한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예수,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전한 자입니다.



인간 예수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도, 기독교도 없다

-<예수전> 중


예수전이라는 이름 탓에 종교인들만 읽는 책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이 책은 오히려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싫어할만한 책입니다. ~전이라는 제목이 대개 그렇듯 책은 인간 예수의 전기를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권좌에 앉아 계시는 예수가 아니라 땅을 딛고 서서 한 시대를 살아낸 인간으로서 예수를 설명하죠. 신앙인들 중에는 사회운동가로서 예수를 바라보는 시선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으나 저자 김규항은 과감합니다. 교리 속에 묻혀있던 예수를 과감히 발굴해내죠. 그의 안내를 따라 마가복음을 한 줄 한 줄 읽어가다 보면 예언자 예수가 꿈꾸었던 새로운 사회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바빌론, 이집트, 그리스를 비롯해 예수가 태어날 즈음에는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 상류층들이야 외세와 결탁해 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인민들은 지배세력과 외세의 이중적인 억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예수의 고향인 갈릴리 지방은 외세의 침략이 잦았습니다. 자연히 혼혈인들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이방 지역 사마리아만큼은 아니더라도 갈릴리 역시 그런 이유 때문에 유다 사람들의 차별과 천대를 받았습니다. 갈릴리 청년들은 분연히 일어나 기득권에 저항해 싸웠고 불의한 현실에서 죽어갔습니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시몬도 무장 항쟁을 기치로 움직이는 ‘젤롯당’의 당원이었습니다. 예수가 걸어온 길은 양을 몰고, 엎드려 그저 기도하는 평화로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조국의 해방을 이끌 선지자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요한은 헤로데아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예언대로 곧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가난한 이스라엘 인민들은 예수가 자신들을 압제에서 해방시켜, 지배자의 자리에 앉힐 민족의 지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 역시 조국의 미래를 생각하며 그의 뒤를 따랐죠. 그 길이 고난일 것을 알면서도.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비단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낮은 자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예수에게 중요한 건 민족이 아니라 계급 해방이었습니다.


예수가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아의 길을 가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제자들은 이윽고 깊은 실망과 자괴감 속으로 빠져들었다.

-<예수전> 중


예수가 자신의 목표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한 한 제자가 결정을 내립니다. "조국의 해방"에 도움이 되지 않을 스승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유다입니다. 그에게 이것은 더 큰 정의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조국의 해방이었지, 모든 사람이 평등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유다가 배신자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자신이 섬기던 스승을 팔아넘긴 역사의 배신자. 그러나 유다의 입장에서는 퍽 억울한 일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니라. (에스겔 21:26)

-<예수전> 중


기존의 프레임 안에서 기준을 세우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의 변화를 말할 때에도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복종하는 체제를 벗어나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낮은 자를 높이고 높은 자를 낮출 것이라는 말을, 지배자의 바톤터치라고만 생각합니다. 올라가는 사람이 있으면 누군가는 그만큼 낮아져야 한다. 유다 역시 그런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위에 올라갈 차례라고. 그러나 예수는 그런 생각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불평등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판단하였고, 보다 본질적인 장애물들을 우리 삶에서 제거하기를 원했습니다.


흔히들 가난은 분배의 문제라고 합니다. 강력한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힘없는 다수는 그들에게 자신의 몫을 착취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힘없는 다수 역시 공평한 분배를 바라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언젠가 자신들이 부자가 될 날을 위해, 더 많이 갖는 사람은 없어지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마몬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또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 ~ 하늘의 새들을 바라보시오.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을뿐더러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주십니다. 여러분이야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릴 수 있습니까? (막 6:24~27)

-<예수전> 중


 “마몬”은 아람어로 물질적인 부를 말합니다. 사람은 최소한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고차원적인 욕구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최소한의 욕구란 식욕, 수면, 안전 등과 같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말합니다.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에게 자아를 탐색하고 정의를 생각하라는 말만큼 우스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말합니다. 죽고 사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신다. 그러니 물질에 대한 고민을 지나치게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예수가 경계한 것은 행복의 기준을 돈과 물질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금욕적인 삶을 강요한 것도 아닙니다. 행복의 기준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죠.


우리는 불확실성을 대비한단 핑계 아래 마몬을 숭배해 왔습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아이에게 부모님은 일단 돈을 많이 벌어야 남도 도와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천 년 전의 유대교가 물질적인 부를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가르쳤듯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물질적인 부는 하나님의 은총이고 부처님의 은공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부모도, 불교를 믿는 부모도 수능 백일 전엔 모두 한마음으로 자녀의 고득점을 기원합니다. 좋은 대학 가게 해달라고. 주님 축복해주시라고.


오늘날에도 부족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했듯이 “낮은 자들이 높아지고, 높은 자들이 낮아진다”는 말을 로또 당첨 예언쯤으로 믿으며 언젠가 부자가 될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예수가 말하는 높아짐과 낮아짐이란, 모든 인민들이 평등해져 누구도 빈부로 인한 억압을 받지 않는 진정한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가난한 상태는 가난한 사람마저도 원하지 않는 최악의 선택지였을 뿐입니다. 마몬의 지독한 포로인 우리들은 예수가 부활한지 이천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를 맞지 못하고 있습니다.






17대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18대 선거는 그것의 재확인이었습니다. 이명박, 제 17대 대통령은 대선 당시 CEO 경력을 바탕으로 “경제 대통령”이라는 화두를 전면에 내세워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 앞에서 "나도 잘 살고 싶다"고 울며 호소한 지방대 학생도 있었고 골목 상권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그가 말하는 ‘경제’를 믿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부흥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평을 받으며 레임덕에 시달릴 무렵 우리에게 새로운 경제 대통령이 나타났습니다. 18대,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18대 대선은 정말 격렬했습니다. 대통령이 결정된 이후에도 사람들은 싸웠습니다. 과거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무너진 한국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새마을 운동의 주역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정치 교육을 받은 박근혜 대통령뿐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민주주의의 후퇴이며 대한민국 시민들의 정치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촌극일 뿐이다. 선거 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든, 적어도 지금은 모두 한마음인 것 같습니다. 살기 쉽지 않다.

밥이 없어 굶어 죽으면 9시 뉴스에 나오는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고 못 살겠습니다.

16대가 되든, 17대가 되든, 18대가 되든 왜 우리는 변함없이 못살겠는 걸까요?

대통령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다면 도대체 이건 누구의 책임인 걸까요?

대통령? 대통령을 뽑은 사람? 그걸 막지 못한 사람?


 “가장 중요한 사회적 비판이 반드시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가장 악한 세력은 그 악함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어, 뒤집어 말하면 그들에 대한 인민들의 적대감이나 반감 또한 일반화되어 있어서, 그들을 비판하는 일은 그런 일반화한 적대감이나 반감을 한 번 더 되새기는 일에 머물기 쉽다. 너무나 지당한 일은 하나 마나 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사회적 비판은 그 사회에서 가장 악한 세력이 아니라 ‘그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주요한 세력’에 집중되어야 한다.”

-<예수전> 중


예수전에 따르면 예수가 유례없이 화를 내며 경계한 인물은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인민들은 이스라엘의 현실과 미래를 고뇌하며 실천하는 바리새인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적당한 삶의 안정과 사회적 존경을 동시에 확보하면서 정작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막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배울 만큼 배우고, 안정되면서도 넉넉한 경제력을 지닌 그들은 고상한 사회의식까지 갖춘 ‘A급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리드하고 앞서 나가며 자신보다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보냅니다. A급 시민들의 개념찬 포스팅과 인스타를 보며 사람들은 그들에게 거침없는 신뢰와 좋아요를 보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저렇게 되어야 한다. 왜 저들이 저렇듯 착하고 여유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억압의 사회체제는 피억압자들의 비굴과 무기력에 힘입어 유지된다.

-<예수전> 중


우리는 무기력합니다. 금수저와 은수저 아니 동수저만 돼도 좋겠다고 자조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손에 쥔 흙수저를 빨아보는 것입니다. 혀에 흙이 배겨 난감할 뿐이죠. 금수저를 부러워할 때 우리는 수저 프레임에 한 표를 보탭니다. 수저의 색깔이 나뉘는 게 당연한 세계.


우리는 또한 비굴합니다. 다큐멘터리 3일이나 인간극장에 자발적인 가난을 좇는 사람들이 나오면 대단하다고 추켜세우지만 내 바로 옆사람이 그러겠다고 말하면 미쳤다고 합니다. 이나영과 원빈의 검소한 결혼식은 대박이지만 나는 축의금을 회수해야 하고, 호텔에서 누가 결혼을 했다더라, 박탈감을 느낍니다. 이런 와중에 결혼식을 안 하겠단 친구는 네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세상 살아봐라 뜻대로 되나. 대학을 거부하는 소수의 운동 꿈나무들은 칭찬하지만, 공부 잘하는 딸이 대학 안 가고 경리를 하며 살아가겠다고 하면 내가 너 때문에 못살겠다, 너는 애가 왜 그렇게 비뚤어졌냐고 할 겁니다. 세금을 안내는 기업 수뇌들을 욕하면서도, 자신의 세금을 아끼기 위해선 부양하지도 않는 할머니를 세대원으로 등록하기도 하죠.


내후년이면 또 선거가 있습니다. 누가 뽑히든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사는 꼴이 바뀌진 않을 테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항상 같을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 테니까요. 금수저 부모가 아쉬운 마음도, 자식에게 다만 동수저라도 물려주고 싶은 마음도 여전할 겁니다. 리더를 선택하는 기준도 여전할 테죠. 누가 나를 잘 살게 해줄까, 누가 몸값을 높여줄 것인가. 삶이 바뀌길 원하면서도 내 삶을 내 손으로 구할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로또 번호를 골라내듯 대통령 번호를 찍으며 인생이 바뀌길 바랄 뿐입니다. 우리에겐 우리를 구할 기회가 매시간 매초 주어지지만 정작 우리의 삶을 편하게 만들 선택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회개를 뜻하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는 길을 바꾸다, 되돌아서다는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복 주시리라는 목사의 음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을 구할 대통령을 찾을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구할 차례 아닌가,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소한의 안전망이 있는 사회. 누군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해도 인격이 망가지거나 지쳐 쓰러지지 않을 권리.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 어떤 조건에서도 모든 인간이 인간성을 유지하며 하루하루를 오직 생계나 병원 값을 고민하며 보내지 않는 세상. 더 나아가 이들에게서도 변화가 시작될  있는 세상.


내 조카들은 그런 곳에서 살게 되면 좋겠단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어디 먼 나라가 아니라 바로 이곳이 그곳이 되었으면.










이런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1. 교회를 다니지만 예수님을 잘 모르겠다

2. 교회를 안 다니지만 예수가 궁금하다

3. 왜 우리는 이모양 이꼴로 사는지 모르겠다

4. 성경을 한번 천천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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