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의 시간>, 아베 나오미/아베 사토루
-<도시락의 시간> 중
[소풍]
아, 버스 누구랑 앉지? 세희가 다른 애랑 앉으면 어쩌지.
소풍을 가기 위해 앉을자리를 고민하는 건 소심한 내게 즐겁지 않았다.
[운동회]
달리기는 맡아놓고 꼴등, 발야구 파울 1위, 날아오는 공 공포증.
운동회는 차라리 합법적 고문 아닐까.
어린 시절 소풍과 운동회를 앞두면 걱정할 게 많았다. 그럼 소풍이나 운동회가 싫었겠다고?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날들을 엄청 기다렸다. 단순히 수업을 안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런 날들엔 특별한 게 있었다.
도시락. 소풍도 운동회도 도시락이 있었다.
엄마한테 가정통신문을 가져다주면 냉장고에 맛있는 게 잔뜩 생겼다.
맛살, 소시지, 단무지, 계란, 미니 돈까스, 유부, 딸기, 참외.
엄마는 음료수만큼은 내가 먹고 싶은 걸로 슈퍼에서 직접 사오게 했는데,
음료수와 물을 한입씩 먹고 냉동실에 얼려두는 게 소풍 전날의 임무였다.
고약한 잠순이였지만 소풍날만큼은 눈이 반짝 떠졌다. 누가 이불을 걷어낼 필요도 없었다.
참기름 냄새면 충분했다. 햄 볶은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면 몸이 저절로 일으켜졌다.
눈을 부비며 부엌에 간다. 냉동실에 음료수가 잘 얼었는지 본다. 꽝꽝 잘 얼었다.
식탁을 본다. 통통하게 살 오른 김밥들이 참기름을 바르고 반질반질하게 쌓여있다.
김밥말이에 김을 놓고 밥을 한 주걱 톡톡 펴던 엄마가 나를 본다. 물그릇에 손을 잠깐 씻더니
말던 김밥은 그냥 두고 김밥산 꼭대기에서 한 줄을 쥐어내 숭덩숭덩 아무렇게나 썬다.
큼직큼직한 햄이랑 계란이 길게 빠져나온 가장 뚱뚱한 꼬다리를 내게 주며 말한다.
"아나, 아~"
양치도 안 했고 눈곱도 아직 안 떨어졌지만 나는 그걸 얼른 받아먹는다.
입안 가득 소풍이다. 참깨알이 고소하게 터지고, 밥알들은 고슬고슬 굴러다니고,
두툼한 지단이 포슬하게 부서질 때 나는 행복했다.
도시락을 싸주는 엄마가 있어서, 엄마가 도시락을 싸고 일 나가도 돼서.
언 물병에 수건을 둘둘 말고, 도시락 통에 김밥 두줄 꽉꽉. 비닐봉투를 두 번씩 야무지게 묶어 가방에 넣으면
마음이 흐뭇했다. 그전에 내가 무슨 걱정을 했었나 싶게.
도시락 메뉴가 뭔지 다 알면서도 도시락을 다시 열 때까지 기다리기가 힘들었다.
아까 다 본 건데도 얼른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게 동동거리다 보면 금방 행복해졌다.
앉으려던 친구랑 못 앉게 돼도 그까짓 거, 이따 같이 도시락 먹으면 되지.
달리기에서 꼴등을 해도, 헤헤, 넘어지진 않았잖아, 이제 김밥 먹자!
도시락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도시락의 시간> 중
사귄 지 한 달 좀 안 되던 날, 남자 친구와 겨울 소풍을 갔다.
그는 도시락을 싸왔다. 전날부터 도시락을 싸온다고는 했지만 큰 기대를 안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 친구는 손가락과 손바닥이 엄청 두꺼웠다. 어느 정도냐면 곰발바닥 같았다.
그 손으로 요리를 한다는 게 잘 상상이 안됐다.
도시락이랍시고 가져온 건 락앤락 반찬통이었는데, 연어 샌드위치가 가득 들어있었다.
잘 구운 잡곡식빵에 훈제연어랑 상추 양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진짜 싸왔구나 내심 감동하는 찰나, 그는 통을 하나 더 꺼냈다. 역시 플라스틱 반찬통.
들어 있는 건 하나하나 껍질을 잘 벗겨 한 알 한 알 떼어놓은 한라봉.
아! 한라봉!
남자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한라봉을 디저트로 내놓더니,
샌드위치를 하고도 좀 남았다며 따로 가져온 연어들에 소스를 뿌리기 시작했다.
연어보다도 나는 한라봉 때문에 자꾸 웃음이 나왔다.
그 두꺼운 손으로 한라봉을 반으로 갈라, 한알 한 알 떼어내고 섬유질도 다 벗겨냈구나.
날씨가 추운데 딱딱한 껍질을 밖에서 벗기면 손이 시렵겠지, 먹기 좋게 가져가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신경 썼어, 너 먹기 편하라고. 이런 말은 하나도 안 했지만 알 수 있었다.
예쁜 포크도, 빈티지한 포장지도, 비싼 도시락통도
아무것도 없었던 그날 새삼 남자 친구가 좋아졌다.
-<도시락의 시간> 중
별 거 없는 책인데.
도시락 사진 하나, 도시락 주인 사진 하나, 도시락을 먹는 사진 하나.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
누가 싸준 도시락인가요, 어떤 반찬을 좋아하나요, 기억나는 도시락은 뭐예요?
그냥, 그뿐인데.
근데 이게 참, 왜 읽고 나면 마음이 뜨끈해지는지. 보온 도시락이라도 든든하게 챙긴 것처럼.
아마도 아베 부부가 도시락에서 마음을 발견했기 때문 아닐까.
도시락의 시간은 그걸 열어볼 사람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나를 위한 도시락도, 당신을 위한 도시락도
한 사람만 생각하는 시간이다.
나를 위한 도시락을 쌀 땐, 오직 나만 생각해도 된다.
내가 뭘 좋아했는지, 요새 몸이 어땠는지, 먹고 싶었는데 못 먹었던 건 뭔지 꼼꼼히 물어보고,
점심의 나를 생각하며 아침의 내가 시간을 쪼개 준비하는 시간.
맛있는 이기심이다.
남을 위한 도시락을 쌀 땐,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사람이 된다.
당신이 당근을 골라냈던 걸 기억하고 당근은 빼고, 며칠 전에 흘리듯 말한 동그랑땡 재료를 준비하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겠는지 생각하며 장을 본다.
재료를 있는 대로 담아 만든 부티나는 도시락이라면, 오늘 힘 좀 썼다! 하는 마음이
냉장고에 있는 걸 대충 볶아 만든 주먹밥엔, 사정이 여의치 않네, 그래도 최대한 맛있게 먹어줘하는 마음이
아니 흰 밥에 김만 담아주더라도, 미안해, 내 맘 알지? 하는 마음이 담긴다
도시락은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다.
처음으로 브로콜리를 먹었을 때는 얼마나 맛있었는지. 고급 프랑스 요리 같은 걸 먹어본 적은 없지만, 분명 정말로 맛있는 것을 먹으면 "맛있다."라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먹는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매일 축적되어 가는 일종의 수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철이 들면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죠. 그래서 엄마에게 감사해요
-<도시락의 시간> 중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우리들이니까. 먹는 건 어쩌면 수행 아닐까.
전날 밤, 쌀을 씻어서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 두는 거야. 신문지니까 쌀이 호흡은 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고. 그걸로 아침에 밥을 지어봐. 밥이 화악하고 부풀어 올라서 깜짝 놀랄 거야. 쌀은 씨앗이잖아. 생명력이 엄청나.
-<도시락의 시간> 중
도시락에 담기는 것은 엄청난 생명력. 그리고 애정.
잘 익은 마음들이 도시락 뚜껑이 열리는 순간 숟갈에 담긴다. 우리들은 마음을 퍼먹으며 자란다.
꼭꼭 씹어 넘긴 마음들이 천천히 소화된다. 마음이 몸이 된다.
마음이 물리적으로 전해지는 놀라움.
그래서 가끔은 도시락을 열고 싶다. 날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고파서. 그 마음으로 배부르고 싶어서.
이런 분께 추천드립니다.
1. 예쁜 도시락 사진을 보고 싶다면
2. 일본인들의 말하기 방식을 알고 싶다면
3. 도시락을 좋아했다면
4. 어쩐지 마음이 허기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