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수영장엔 열에 아홉이 할머니다. 샤워기 밑에서도, 레인에서도 할머니들은 자기들끼리 정답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등을 밀어주고, 꼬인 수영복 줄을 풀어준다. 얘, 이거 놓고 갔어! 어머어머, 내 정신 좀 봐. 연수반 선생님, 볼수록 잘났지, 새로 온 아쿠아 강사는 예전만 못해. 할머니들은 재잘거린다.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맨몸으로 노래도 실컷 부른다.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집 밖에서 할머니들은 참 건강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언니, 많이 하고 가.”
헤어질 때 하는 인사는 앞으로의 복을 비는 인사. 수영을 마치고 할머니들은 서로의 '많이'를 빌어준다. 할머니들의 복은 '많이 하는 것'이다. 아프지 마, 잘 해, 오늘도 멋지게 해가 아니라. 그것이 나를 서글프게 한다. 할머니들의 기분좋은 건강함을 잊게 할 만큼.
우리 수영장 한 달 이용권은 8만 원이 못된다. 월-토 매일 나올 수 있는 가격이다. 연회원으로 등록하면 거기서 만 오천 원이 빠진다. 연회원권은 선착순으로 판매하는데, 나는 개시 첫날에 등록했는데도 81번이었다. 내 앞의 80명 중 대부분은 할머니였다. 한 달에 육만 원. 십만 원도 안 되는 돈. 할머니들은 이 돈을 버릴 세라 바지런히 수영장에 출근한다. 감기라도 걸려 못나오게 되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말이 사우나지 관리도 잘 안될 조그만 온탕에서 땀을 쪽 빼고, 자유형을 두어 바퀴 돌고, 건식 사우나에 갔다가, 바리바리 싸온 건강차를 마셨다가, 이번엔 배영을 했다가, 손주들 소식을 교환하다가, 며느리를 탓하다가, 나도 며느리지 아차 웃다가. 할머니들은 매일 나오는 동네 수영장에서 어쩌다 한 번 온 워터파크처럼 논다.
“왜 이렇게 조금하고 가?”
일찍 나가는 친구에겐 알뜰한 걱정이 꽂힌다. 낸 돈을 끊임없이 의식하는 조바심. 저 고난의 시절, 티끌이라도 모아야 안심되고 뽕을 뽑아야만 후회 없던 시절. 그 시절이 할머니들의 몸에 아로새겨져 터져 나오는 당부. '많이 먹어', '많이 해', '많이 좀 줘'. 할머니들의 애교 어린 부탁에선 낭만따위 겨를없던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뷔페에서 반찬을 몰래 싸서 나오다 웃음거리가 됐던 어머니들이 할머니가 되어, 수영장에 나온다. 많이 하란 인사는 내게 그 세월의 억척스러움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그 억척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음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언제나 ‘돈값’에 민감하다. 돈을 내면 반드시 그 값을 해야 한다. 야심차게 착즙기를 샀을 때도 착즙한 병마다 가격을 매겨 내가 지금 얼마큼 투자금을 회수했는지 계산했다. 손익분기점을 돌고 나서야 나는 안심했다. 합리적인 소비였고, 낭비하지 않았다. 나의 소비는 할머니들의 것에 가까웠다. 중요한 건 '많이'고 분위기나, 내 기분은 언제나 후순위였다.
공부하려고 혹은 글을 쓰려고 카페에 가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그것들은 모두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렇게 돈을 쓰는 게 싫었고, 가계부에 쓸데없이 -5000원이 적히는 게 싫었다. 바지 핏이든, 컷의 길이든, 유행이 저 혼자 내쳐 달리도록 나는 내버려둔다. 유행을 따라가지 않아도, 쑥스러움을 조금 참으면 살아갈 수 있으니까. 디자인은 언제나 나중 문제다. 가격과 내구성, 후기를 철저히 비교한 뒤에야 개중 나은 것으로 고르는 정도다. 어쩌다 귀찮아서, 시간이 없어서 이 과정을 생략하면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칠푼이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내 취향은 빛볼 틈이 없었다. 내 가계부 속 낭만은 항상 내 양심을 건드렸고, 내 자취방의 낭만은 다이소가 허락한 범위 안에서만 가능했다. 그마저도 카드 영수증을 확인할 때면 괴로웠다. 나는 왜 자제력이 없을까.
그래서 처음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는 놀랐다. 선반 위엔 귀여워서 모으는 플레이 모빌이, 식탁 위엔 빵을 굽는 기능보다 시각적인 즐거움에 더 집중한, 내 기준으로는 쓸데없이 비싼 토스트기가 있었다. 친구의 집은 아늑하고 예뻤다. 거기엔 독립의 낭만이 있었다. 집을 분위기 있게 만드는 건 쓸데없는 것들이구나. 오직 기분을 내는 것이 돈값의 전부일 수도 있구나. 나는 이 쓸데없음 앞에 주눅이 들었다. 나는 돈값을 따져야만 앞으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으니까.
친구들이 훌쩍 떠나는 여행 앞에, 헤어샵에서 받는 관리 앞에, 그냥 조금 우울해서, 그냥 조금 화가 나서 쓰는 돈들 앞에 나는 합리적인 인간이어야만 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꾸민 신혼 선배들의 집을 볼 때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거 맞지, 너스레를 떨며 찍은 해외여행 사진들을 볼 때마다, 그 모든 낭만적인 일기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내가 옳아야 했다. 내가 센스 없는 게 아니라, 이렇게 뒤쳐지는 게 아니라. 친구들의 낭만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고 나의 삶은 그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운 거라고 믿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삶은 가장 젊은 부분마저도 너무 메말랐으니까. 그 메마름이 언제고 나를 주저앉힐 것 같았다.
다행히, 세상은 내 편이었다. 세상의 가르침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함부로 돈을 쓰지 말고, 철저히 계획해서 미래를 준비할 것. 오늘 지나면 없을 낭만에 낭비하지 말 것. 포털 메인에 낭만적인 신혼부부들의 집이 소개될 때면 댓글들엔 일침이 가득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나 보자, 애만 낳아도 달라질 걸. 낭만을 좇아 사는 사람들에겐 철없어 좋겠다는 비난이 따라붙었다. 다 한 때의 감정이라고. 돈 있으면 누가 그렇게 못 사냐고. 나는 그 악플들을 읽을 때 안심했다. 그래, 내가 맞아. 돈으로 사는 건, 진짜 낭만이 아니야. 그냥 사치지.
내게 낭만은 이런 것이었다. 맥주 한 캔 사들고 한강을 걷는 것이나, 편의점 음식으로 나름의 기분을 내보는 것들. 하지만 현실은 돈 없는 나의 낭만에도 야박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20대의 비참한 현실이라고 했다. 나는 비 오는 날 소면을 끓여 간장과 참기름만 넣고 비벼먹을 때도, 대학생 때 돈이 없어 매일 남자 친구와 김밥천국에 갔을 때도, 그렇게 배를 채우고 카페 가는 것도 아까워 한강에 돗자리 깔고 수다 떨던 시절에도 비참하지 않았다. 그것도 엄연히 낭만이니까. 아주 더운 날에도 아주 추운 날에도 우리는 한강에 갔고, 나는 그 시절에도, 그때 보단 돈을 백배 잘 버는 지금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는 우리가 좋다. 하지만 그건 낭만이 아니라 한다. 비참이라고 한다. 자기 합리화고, 과거에 대한 미화며 능력 없어 떠는 궁상이라고 한다.
세상은 돈으로 얻은 낭만은 허영이라 손가락질하고, 돈 없는 낭만은 칼같이 검열한다. 세상은 이웃의 낭만에 관심이 많다. 빨리 이룰 수 있거나, 많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쓸모없는 것으로 밀어 넣는다. 수많은 젊은 것들이 자기의 쓸모를, 자신의 돈값을 증명하기 위해 발을 동동거린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는 그렇게 쓸모의 사회를 이뤘고, 서로의 낭만 감시자들이 되었다. 오그라들지는 않나, 허세를 떨지는 않나.
쓸모를 증명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사회에서 낭만은 그 자체로 죄인 걸까. 낭만은 쓸데없이 돈을 낭비하거나, 가난을 미화하는 것뿐일까. 그래, 나는 친구들이 쓰는 돈이 부럽다. 그래서 가능한 낭만이 부럽다. 이국의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시켜놓고 써지지 않는 글을 쓰는 것도, 귀여운 라탄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장을 보러 가는 것도. 하지만 나는 조그마한 나의 낭만들도 사랑한다. 다 먹은 맥주병에 아이비를 키워보는 것도, 퇴근하고 2500원짜리 수입맥주 한 캔 시원하게 마시며, 그걸로 꽤나 돈 쓴 듯 오직 나만 생각한 것 같이 뿌듯해하는 것도. 홀로 싸구려 스탠드를 켜고 앉아 앞으로 할 일들을 정리해보는 것도. 낭만이 있어 하루는 좀 더 살만한 게 된다. 딱히 쓸모없었던 하루가 조금 반짝이게 된다. 내게도, 내 부러운 친구들에게도, 인터넷의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사는 곳이 헬조선이니까. 하필 불반도에 살고 있으니까 우리는 안간힘을 쓰며 오그라들지 않으려 한다. 신랄해야만 똑똑하다고 믿는다. 무엇이든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하려고만 한다. 어차피 현실은 이렇다고, 도가 튼 것처럼 군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게 낭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 이웃의 낭만을 탐하지 않고, 또 탓하지 않을 여유라고 또 생각한다. 낭만들에 관대해질 수 있는 대범함을 갖고 싶다고. '많이 하지 않아도', '뽕뽑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쓸모없을 수 있는 용기를.
헤어질 때 하는 인사는 그 사람의 복을 비는 거라고 했다. 수영장을 나설 때마다 나는 할머니들의 복을 새로 빌고 싶다. 이제,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돈값하지 않아도 된다고. 멋있는 남자 있으면 꼬시고, 그게 수영장에 나온 전부여도 된다고. 당신의 수영시간이 더 낭만적이면 좋겠다고.
“언니, 놀다가. 질리면 그냥 가. 우리, 그래도 돼.”
*표지그림, David Hockney, Gregory in the Pool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