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있는 오월의 상상
어머니, 등이 조금 가렵고, 배가 끊임없이 고프다는 것을 빼면 그럭저럭 괜찮은 일요일입니다. 세탁기는 쌓인 빨랫감들을 싱크대는 설거지거리들을 화장실은 수채 구멍 냄새를 꾸역꾸역 버텨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제자리에서 제 몫을 감당하고 있는 아침입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곧 출근을 해서 아이디어 회의라는 것을 또 한 번 해야 하지만 제 문서 파일들은 여전히 빈칸일 뿐입니다. 언뜻 상사의 성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 머저리 새끼,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 것도 같고요. 이제는 익숙한 일이지요. 그러나 어머니,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저도 제 몫을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직무란 어찌 됐건 살아내는 것 아닐까요. 저는 꿋꿋이 들이쉬고- 내쉬고- 출산 직전의 순간처럼 한숨 한숨 중요하고 지긋하게 숨 쉬는 법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직장인으로서의 호흡을 익히는 중, 이랄까요. 어머니의 자식은 이렇게 기특합니다.
어머니, 저는 비어있는 것들을 보면 참을 수 없이 불안하고 막막합니다. 어머니께선 자식들에게 한 번도 쓸데없이 분량 채우라 가르치신 적 없지만 저는 어머니의 돈으로 자라나며 순 그런 것만 알게 된 것 같습니다. 빈 종이와 빈 계좌, 심지어는 비어있는 시간들만 봐도 견딜 수 없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것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빈 두뇌로 들어와 회의실 의자만 간신히 채우는 임원들과 내용도 없이 살뜰히 꽉꽉 채워 쓴 제안서들을 보면 여백의 미, 무의 미학 같은 건 그냥 무의미 학의 띄어쓰기를 잘못한 슬로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건만 왜 이런 때조차 저는 내용을 채워야 한단 압박에 시달리는지요. 이제 고작 에이포 용지의 삼분지 일, 어머니의 자식이 건강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어머니 저는 이곳 서울에서 미운 사람들을 연구 중입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그것이 알고 싶다는 세상의 미스터리들을 다루지요. 김상중 씨와 제작진들이 거국적인 미스터리를 밝혀 세상살이에 일조한다면, 저는 미시적인 미스터리들을 목격하며 제 인생살이에 전혀 일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개인적인 미스터리들. 박 부장은 왜 발가락 사이를 후벼 파고는 그 손 그대로 콧구멍까지 파내는가, 오대리는 왜 소변을 누면 손도 씻지 않고 지혜 씨의 등을 토닥이며 격려하는가와 같은. (어머니께서 걱정하실까 덧붙이자면, 저는 코도 파지 않고 소변을 보면 항상 물비누로 깨끗이 손을 씻습니다. 박 부장과 오대리도 알고 보면 착한 사람들입니다.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의 동의어가 아니란 것을 이제는 저도 알았으니, 어머니께서는 부디 마음을 놓으세요.)
박 부장과 오대리는 둘 다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둘은 좋게 말해 유유상종, 쉽게 말해 또이또이, 그게그거입니다. 둘의 외모, 직업, 성격, 취미, 성향, 지향점 등 자아를 구성하는 6개 요소를 뽑아 육각형 그래프를 만들면, 어머님이 좋아하는 테팔 프라이팬 3종 세트처럼 서로의 모양이 서로에게 쏙 들어갈 것입니다. 어떤 면을 봐도 비슷하단 뜻이지요. 그런데 왜 같은 짓을 해도 저는 오대리가 유달리 미운 것일까요.
어머니, 제가 아침에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들고 멋지게 출근합니다. 먼저 나온 오대리가 출근하는 저를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나도 커피, 합니다. 저는 아메리카노를 얼굴에 부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고 웃는 낯을 끝까지 지키며 그를 잠시 바라봅니다. 오대리는 제 손에 들린 컵과 제 눈빛을 끝끝내 모른척하며 침묵을 지켜냅니다. 번번이, 저는 그 침묵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대리님, 카페 가실래요? 저는 이미 사온 아메리카노를 자리에 두고 카페에 갑니다. 오대리를 모시고 갑니다. 계산대 앞에 서면 오대리는 이번엔 끝끝내 제 뒷자리를 지킵니다. 이번에도 저는 제 카드를 먼저 꺼내 들고야 맙니다. 오대리가 주문합니다. 어, 나는 민트프라푸치노. 너는? 네가 안 마시면 내가 너 끌고 온 것 같잖아. 하하. 오대리는 착한 사람입니다, 어머니. 저는 날아올 신용카드 이용 문자를 생각하며, 가계부에 적힐 마이너스를 생각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꾸역꾸역 더 시켜냅니다. 프라푸치노 용 굵은 빨대를 까는 오대리가, 어머니, 저는 너무 밉습니다. 오대리의 바지춤에서 지갑을 꺼내 발급받은 신용카드들을 하나하나 세어 가며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릴 수만 있다면. 인마, 있네, 여기, 카드, 긁어, 새끼야, 쫌, 나온 카드 수만큼 오대리의 엉덩이와 엉덩이 사이를 시원하게 긁어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머니, 놀라지 마십시오. 상상일 뿐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조그만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냥 좀 주접스러운 일이죠. 돈 몇 푼 더 쓰면 되는, 어머니의 자식이 저녁 한 끼를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정치 문제로 화제가 업그레이드되는 순간, 오대리에 대한 저의 마음은 미추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버립니다.
오대리는 호사가입니다. 그러나 제발 부디 대통령 이야기만은 참아주었으면. 오대리는 이럴 때만 정의의 수호자가 됩니다. 뭐? 너 제정신이야? 이번 투표가 얼마나 중요한데? 안보와 경제와 미래를 생각하면, 무엇보다 우리 자식들을 생각하면 대통령은 삐-지.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는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과 소신을 주입하는 데 있어서는 교육부 장관 못지않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울컥울컥 치미는 말대꾸를 참아내느라 언어적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지요. 오대리 이 등신머저리쪼다새끼야 너는 인마 국민학교 사회시간마다 딸딸이라도 치고 앉았었냐 비밀선거의 원칙 모르냐 비밀 시발 니 투표 쪼가리에 찍은 빨간 도장이 시발 퍼킹 비밀이라고 니 등신 같은 견해와 자성의 소리는 부디 투표날 투표용지와 투표 도장과 너만 알면 안 되겠냐. 시시때때로 역류하는 말들을 저는 가까스로 삼키곤 합니다. 어쨌거나 어머니, 용서하십시오. 오대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거칠어지고 맙니다.
어쩌다, 정의가 이렇게 값싼 것이 되었을까요. 입만 열면, 타이핑만 쳤다 하면 모두가 뭔가의 수호자가 됩니다. 자유를 지키고 대의를 섬기고 다들 비대해진 정의감을 몇 바이트의 문자에 실어 나릅니다. 어머니, 그래서일까요. 결핍과 여백을 마음껏 견뎌내던 시간이 더욱 그리운 아침입니다. 몸에 말이 익기를 기다리던 시간이, 살아내기 전까지는 함부로 말하지 않던 시절이 더 그리운 5월입니다.
시간이 벌써 다 되었군요. 이제는 정말로 오대리에게 바칠 문서를 수정하지 않으면, 그 머저리에게 머저리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머니, 이 가정의 달 오월, 가정의 행복 따윈 여전히 제게 가정에 불과하지만 저는 멀리서 어머니의 행복을 빕니다. 매일 밤 9시 뉴스와 함께 시작될 아버지의 글로벌폴리티컬이슈토크와 선거가 끝날 때까지 카톡으로 부지런히 배달될 각종 받은 글들이 부디 어머니께 저만큼 괴롭지 않기를 빕니다.
투표날에도 저는 출근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어머니. 저는 비밀의 무게를 짊어지고, 오대리와 같은 자에게도 평등한 정의를 실감하며 보통의 노동자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한 표를 행사하려 합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자리에서, 저는 제 자리에서 제 몫만큼 지켜내는 오월이 되기를, 출근하는 일요일 노동자의 자식은 감히 기도합니다.
몇 번을 찍는 것이 자랑이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곤란해지는 게 아마 저뿐만은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