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사우디 아라비아 파견 노동자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사우디 시절 이야길 듣는 걸 좋아했어요.
스물여덟에 아버지는 먼 나라의 모래 언덕에서 총격전에도 쫓겨봤고,
운전하다 핸들 쪽으로 기어오는 고슴도치를 피하느라 앞니가 없어질 뻔도 했어요.
나보다 어렸던 아버지는 사막의 열풍을 맞으며 번 돈으로 반자동 카메라를 샀습니다.
니콘 L35AD.
곧 결혼도 해야 하는 시골 총각이 사려면 큰 마음을 먹게 했을 물건.
아마도 그것이 아버지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데 쓴 마지막 소비가 아닌가 싶어요.
덕분에 생후 0개월의 나와 대학시절의 나는 모두
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 속에 다양한 얼굴로 남아있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 이국의 모래 언덕에서 팔짱 끼고 짝다리를 짚고 사진 찍던 젊은이가 아닙니다.
통키 아빠처럼 풍성하고 까맣던 머리카락은 하얗게 셌고요.
이제 별다른 일과도 없습니다.
TV를 보고 가끔 화를 내다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러 나갈 뿐이죠.
어느새 자기가 기른 딸들과 대화하는 것도 어색해진 늙은이.
부엌 찬장에서 십 년 만에 그의 카메라를 발굴해냈습니다.
먼지 앉은 아버지의 낭만을 발굴해낸 기분이었습니다.
카메라의 겉모양이 괜찮기에, 건전지를 갈아 끼우고 셔터를 눌러보았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카메라를 고쳐보고 싶었습니다.
카메라를 샀던 아빠보다 누나가 된 내가
가족들이 모두 잊은 이 카메라를 고쳐 아빠에게 돌려준다면 어떤 의미가 생길 것 같았어요.
필름 카메라를 잘 고친다는 분을 찾아 세운 상가로 갔습니다.
오래된 세운 상가 말고, 건너편의 세운스퀘어 별관 1층에 유명한 필름 카메라 수리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런저런 카메라 수리상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손님이 있는 것은, 저도 찾아보고 온 제일 카메라 하나뿐이었습니다.
그곳의 유리 진열대는 카메라의 무덤이었습니다.
수명을 다했거나, 언젠가 운이 닿아 고쳐지기를 바라는 카메라들이 잔뜩 쌓여 있었죠.
카메라의 영혼은 필름일까요.
필름 없이 몸만 남은 카메라들은 옛날의 추억들마저 잊은 채 영혼 없이 죽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일 카메라 아저씨는
그 진열대 위에 AROUND 잡지를 올려두셨어요.
아저씨의 인터뷰가 수록된 호였죠.
인터뷰도, 벽에 걸린 멋진 사진도,
작업하시는 모습도
과연 장인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믿음직스러웠어요.
아버지의 카메라를 맡기고 청계천을 배회하며
카메라 아저씨가 약속한 1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카메라는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요.
아이구, 이건 못 고치겠네요.
1시간 뒤, 아저씨로부터 받은 연락은 부고였습니다.
내내 들어있던 건전지 누액이 심해서 카메라가 모두 부식됐던 것입니다.
손 쓸 도리가 없을 만큼.
오랫동안 카메라를 안 쓸 때에는 건전지를 반드시 빼놓아야 한단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카메라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가, 오히려 카메라의 수명을 깎아먹었다니.
대단한 우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어요.
카메라를 맡겼다가 실패하고 나오도록
이 세운스퀘어 1층에는 손님들이 오직 제일 카메라에만 줄을 서 있는 겁니다.
모두가 몇십 년 동안 카메라를 고친 사람들일 텐데
'진짜'가 된 건 제일 카메라 하나구나.
속상했습니다.
모두들 매일 밥 먹으면 카메라 고치고, 카메라를 고쳐서 또 밥을 먹고
나름의 성실과 일에 대한 애정으로 살아왔을 텐데
누군가는 그 시간을 온전히 인정받고 누군가는 그저 배경이 될 뿐이라니.
세상엔 무엇이 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사실은 당연하죠.
지난겨울에는 같이 사는 사람이 퇴근길에 결재 도장 하나만 파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야근이 갑자기 생겨서 도장 가게 닫기 전에 갈 수 없을 것 같다고요.
우리 집은 세무사 사거리 골목에 있어서 근처에 도장집이 많았습니다.
저는 말 그대로 '아무' 도장집에나 들어갔어요.
부탁받은 결재 도장을 하나 파고,
그러고도 돈이 남으면 같이 사는 사람과 제 별명으로 막도장도 하나씩 파야겠다 마음먹었죠.
막도장은 값이 얼마면 될까요?
저는 한 천 원이면 족하다 생각했습니다.
결재 도장은 팔천 원이었고, 막도장은 이천 원이었어요.
예산을 만원으로 잡았던 저는 막도장은 하나만 파야겠다 마음먹었죠.
그런데 아저씨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막도장은 컴퓨터로 해줄까, 내가 파줄까.
아, 컴퓨터가 도장도 팔 수 있구나.
때 이른 4차 혁명을 실감하며 아저씨께 직접 하시는 것을 보고 싶다 부탁드렸습니다.
결재 도장을 파는 기계가 돌아가는 동안, 낡은 의자에 앉아 도장집을 돌아봤어요.
팩시밀리 국내 80원, 해외 200원.
구멍 날 것처럼 닳은 주전자, 오래된 화로. 반들반들해진 서까래.
마포구 인허가 1968년.
아저씨는 우리 아빠가 태어나 결혼하고 나를 낳고 쉰 살이 되도록 도장을 파오신 겁니다.
아저씨는 일이 없을 때도 매일 '김'씨 '이'씨 '박'씨는 막도장에 미리 새겨놓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성씨니까, 손님이 오면 빨리 깎아서 드리려고요.
50년의 매일매일이 쌓인 '막'도장. 값은 이천 원.
막도장을 하나 더 파기로 했습니다.
피카소가 매일 그림을 그리니까, 나중엔 획 하나만 그어도 작품이라고 했잖아요.
도장 아저씨의 1획을 갖고 싶었습니다.
아저씨는 도장을 새기다가 한번 실수를 해서 왼쪽 오른쪽이 바뀌었어요.
이건 버려야겠다, 하시길래 버리지 말고 선물로 주십사 했습니다.
기계는 절대로 안 할 실수.
50년을 도장만 팠어도 나오는 실수.
기계가 찍어준 결재 도장과 아저씨가 직접 파신 막도장 두 개,
그리고 아저씨의 실수까지 가지고 가게를 나오면서 마음이 무거웠어요.
그동안 엄청난 사기를 당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2만 시간의 법칙이라든가, 아무도 성실함은 당해낼 수 없단 얘기를 우린 얼마나 많이 들었나요.
왜 다들 보상이 없는 건, 그만큼 노력을 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하게 했을까요.
그렇다면 50년 동안 도장을 파고도 아무것도 되지 않은 사나이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도장 파는 일 같은 건 가치가 없는 일이라 아무것도 되지 않은 걸까요.
제일 카메라를 빛나게 하는 그저 그런 카메라 집들,
그 카메라 집들은 장인정신이 유달리 부족했을까요.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들인 시간만큼 보상을 얻는 것조차 사실은 소수의 특권이라는 것을요.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도 아무리 성실하게 매일 노력해도
어쩌면 기계보다 못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요.
니콘 카메라를 샀던 아버지는 30년 뒤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을까요.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어린 자식들을 렌즈에 담으며 어떤 미래를 상상했을까요.
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가끔 술도 나눠 마시는 멋진 아버지를 떠올렸을까요.
지금 아버지 방에는 없는, 그런 아버지를, 아버지는 상상했을까요.
아무것도 되지 못한 아버지의 아무것도 아닌 자식이지만
아버지가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 내 인생 한 순간이나마,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오롯이 반짝거리던 때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버지가 남긴 아무것도 아닌 사진이 있어 그의 낡은 카메라를 고쳐보게 합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가치 없는 인생은 아니라고 외워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지프스는 똑똑한 게 죄가 되어 벌을 받았습니다.
언덕 위에서 굴러 떨어져 내리는 바위를,
굴러 떨어져 내릴 줄 알면서도, 한 번 더 언덕 위로 밀어 올리는 벌.
거기서 바위를 밀어 올리지 않고 바위에 깔려 죽을 수도 있었지만 시지프스는
계속 계속 바위를 밀어 올리고 떨어지면 또 밀어 올렸습니다.
그 동작은 아무런 보람도 성취도 되지 못합니다.
결국 신이 내린 벌은 무의미의 어마어마한 반복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무래도,
아무것도 되지 않을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일인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무의미에도 지쳐 넘어지지 않고
아무것도 되지 않을 자신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고
다시 떨어질 돌 하나를 매일매일 열심히 올리고도
벌이라 여기지 않는 것이
바로 어른이 되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되지 않는 것을 불안해하기보다,
무엇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충분히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장 파고 글 쓰는 모든 일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
되든, 되지 않든.
빛나는 얼굴로 무엇이 되어가는 사람들 앞에서도
나만의 돌을 끊임없이 굴리는 게 인생이라고
오늘도 이렇게 무의미의 돌을 하나 굴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