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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Jun 24. 2017

1998, 파티

생일이 1월이면 억울하다. 생일이 1월인데, 시내에서 집까지 오는 버스가 하루에 딱 두 대밖에 없으면 더 억울하다. 이런 조건에선 부모의 전폭적인 도움이 없으면 절대로, 결코, 파티 같은 생일파티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년간 나는, 학기 내내 친구들 생일에 선물을 갖다 바치다가,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애라고 할 만한 건 송아지와 강아지 밖에 없는 마을에서 나조차도 내 생일을 까먹고 살았다. 생일파티 나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 집까진 치킨도 배달 안되고, 피자도 배달 안되고, 동네 가게엔 아이스크림도 없고, 애들을 데려오려면 아빠 대신 목장일 할 사람이 필요하고, 아무튼 안 되는 게 많았다. 거기다 엄마는 생일 파티 같은 건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무시했다. 나, 애들 맞는데.


초등학교 4학년, 나는 유치원 때부터 썸을 타던 남자아이와 관계 정의를 마친 상태였다. 유치원에서 선생님들은 짝 지어 뽀뽀할 일이 생기면 꼭 그 남자애가 내게 뽀뽀를 하게 했다. 나는 걔랑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유치원을 졸업할 때 나는 우리 마을이 얼마나 작은지는 생각도 못하고, 이제 여길 떠나면 저 남자애랑도 끝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국민학교 입학식 때 운동장에서 그 남자애를 보고 얼어붙었다. 나는 그때 엄마가 고른 분홍색 망토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그러다 걔랑 눈이 마주쳤다. 걔가 먼저 웃었다. 나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면 그 뒤에 “또 보네요.”라는 말을 붙여야 할지 말지 엄청 고민했다. 너무 폼을 잡나, 걱정스러웠다.


걔와 나는 ‘남자애가 여자애를 괴롭히는 건 좋아한다는 뜻이야’를 거쳐, 몇 번의 진실게임과 대화장을 떼고, 마침내 반 아이들 모두가 인정하는 공식 커플이 되었다. 우하하. 1학년 1반 16명의 아이들이 그대로 6학년 1반까지 올라가는 작은 학교에서, 그리고 그 학교에서 넉넉잡아 1시간은 걸리는 우리 집까지 그 아이를 생일파티에 초대하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얼마나 초대하고 싶었을까.


4학년 겨울 방학엔 운이 좋았다. 무슨 조화였는지 내 생일이 설날 근처였다. 걔네 집이 운 좋게 큰댁이었다. 11살 남자애에게 친척들을 기다리고 대접하는 일이 얼마나 지루했겠는가. 걔는 설 전날에 그 먼먼 우리 집까지 놀러 오겠다고 했다. 말했듯이 우리 마을엔 아침 8시, 저녁 8시 이렇게 두 번만 버스가 들어왔다. 걔는 아침 7시부터 일어나 7시 반에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우리 마을엔 8시에 도착했다. 나는 우리 집에서 15분 걸어가면 있는 방앗간 앞에서 그 아이가 내릴 버스를 기다리느라 7시부터 일어났다.


걔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에게 덥석 생일선물부터 안겼다. 나는 입꼬리를 겨우겨우 끌어내리며 가끔 지붕에서 우다다다 쥐들이 뛰어대는 우리 집으로 그 애를 이끌었다. 방앗간에서 마을 끝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는, 둘째 큰엄마네, 5촌 당숙 큰엄마네, 위엣집 큰엄마네, 큰댁의 큰댁 등 온갖 친척들이 줄지어 살았다. 나는 우리 일족에게 대뜸 외간 남자를 데뷔시킨 셈이었다. 


내 생일이었지만 케이크는 없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초코파이를 한통 사서 나눠먹었던 것 같다. 나는 소들에게 먹이를 줄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우리 집 우사로 걔를 안내했고, 아빠의 허락을 받아 둘이서만 송아지에게 우유를 먹였다. 나중에 결혼하면 애 이름을 뭐로 하자는 얘기를 주로 했던 것 같다.


설 전날이라 우리 집엔 먹을 것도 엄마도 없었다. 우리는 먹을 것을 찾아 위엣집 큰엄마 네로 갔다. 큰엄마는 걔와 나를 귀여워도 대견하게도 잔망스럽게도 여기며 떡국을 두 사발 내주셨다. 문제는 여기부터였다. 큰엄마에겐 딸만 셋이 있었는데, 그중 제일 큰 선미 언니는 스물여덟까지 시집을 못 갔다. 그게 어른들에겐 그렇게 가슴 아픈 문제였다. 저 어린 애도 설이라고 남자를 데려오는데 에잉 쯧쯔, 라는 큰아빠의 목소리가 내 귓전엔 아직도 생생하다. 그 순간 별안간 맛없어진 떡국 떡도 기억난다. 문득 이 상황이 얼마나 남사스러운지 알게 된 나는 황급히 그 애를 데리고 거기서 도망쳤다. 그 날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다음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너무 쪽팔리면, 쪽팔림의 절정까지만 생생하고, 그 이후의 일은 거기 압도되어 사라지나 보다. 


나의 어설픈 연애 감정이 나는 죄스러웠다. 언니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사죄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남자를 데려와 폐를 끼친 만큼, 언니에게 남자를 만들어주자.


머릿속에 전화데이트가 스쳤다. 얼른 전화번호부를 뒤져 전화데이트에 연결했다. 나는 내가 언니에 대해 아는 정보, 주유소 2층에서 경리를 보고 있다는 것, 해바라기와 신승훈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언니 책장에 꽂혀있던 서른, 잔치는 끝났다 와 같은 책들을 동원해 있는 힘껏 스물여덟의 선미 씨를 흉내 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지만, 나와 연결된 남자는 선미 씨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와 나의 대화는 무려 1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남자는 이번 설 연휴에 선미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우리 주유소로 찾아오시면 멀리서 꽃 한 송이를 들고 서계시겠어요? 한 일주일 정도만요. 그렇게 그냥 자주 멀리서 모습을 보여주시면, 서서히 가까워질게요. 꽃 받아보는 거 소원이었어요. 그렇게 하면 이 일을 모르는 언니도 그 남자와 인연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언니에게 큰 은혜를 갚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껏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수화기를 잡고 있던 그때, 엄마가 들어와서 전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야 이런 개XX야 너 국민학생 데리고 뭐 하는 거야


너 미쳤니!! 엄마는 고함을 치며 나를 밀쳐냈다. 동생이 엄마한테 이른 것 같았다. 아주 신나게 혼났다. 그때 전화비 폭탄을 맞았음은 물론인데, 엄마는 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듣더니, 이걸 믿어줘야 할지, 발랑 까졌다고 혼내야 하는 건지 고민하다가,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머리가 아파져서 더 이상 혼내길 포기했다.


2년 뒤에 언니는 서른 살의 나이로 기적처럼 결혼했다. 상대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리고 나는 국민학교가 아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언니의 서른 살은 파티의 시작이었을까? 아니면 끝이었을까? 

20년 전에 내가 언니를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지 언니는 마흔 살인 지금도 꿈에도 모를 거다.

나로 말하자면 아직도, 파티를 생각하면 설날에 대뜸 우리 집에 떡국을 먹으러 왔던 그 남자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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