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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틸킴 May 15. 2018

사건 이후의 삶

<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내 나름의 불행들은 물론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다 눈을 떠보니 응급실이었다든가, 싸움을 말리다 입술이 찢어져 열 바늘 가량 꿰맸다든가. 그럼에도 사건에 관한 한, 내겐 한마디의 발언권도 없다고 느낀다. 그것들은 내 건강이나 정신을 무너뜨리지는 못하는 일이었다. 우연한 불행, 잠시 뒤면 사그라들 소동에 불과한 것들. 나는 아직 일상을 파괴하는 사건을 겪은 적은 없다. 만약 나의 세계를 걸어야 하는 대사건이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사건 이후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 곤란한 물음이다.


스릴러물은 대개 사건에 탐닉한다. 이것은 내가 사이코패스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엔 이유가 없다. 피해자들은 언제나, 하필 그 자리, 그 시간에 있던 게 문제다. 중요한 건 사건이지,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얼마나 충격적인지, 그래서 범인은 잡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영화 속 피해자는 인간의 선한 면모를 부각시키는 장치 혹은 긴장을 극대화하는 연출에 그친다. 스릴러 영화에서 사건의 끔찍함은 마치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처럼 포장된다. 가상의 존재일지라도, 이렇게 두 번 세 번 이용당하는 피해자들이 나는 불편하다.  


사건 이후를 말하는 스릴러. 영화 <Room>은 그래서 특별하다. 사건 이후의 삶을 다룰 때 피해자는 비로소 주인공이 되니까.  <Room>은 범죄의 공간인 동시에 한 아이가 어느 날 인생을 시작한 곳이다.


“우린 잠들면 어디로 가?” “우린 아무 데도 안가.”  

“그렇지만 꿈에선?” “그냥 여기 있는 거야.”

- <Room> 중, 잭과 조이의 대화
 

잭은 6살. 그에게 세상은 한평 남짓한 방이 전부다. 침대도, 화장실도, 부엌도, 욕조도 같은 벽 안에 다 들어있다. 잭은 엄마와 단 둘이 이 작은 세계 안에서 살아왔다. 방을 벗어나 본 적도, 그 바깥의 세계를 상상해본 적도 없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본 적도 물론 없다. 꿈에서조차 그들은 방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 둘을 가둔 사람 뿐이다.


잭의 엄마는 7년 전 납치, <Room>에 감금당했다. 이름은 조이. 17살 때의 일이었다. 납치범은 조이를 가둬놓고 주기적으로 강간했고, 그 과정에서 잭을 출산하게 했다. 생물학적으로 잭은 납치범의 자식이나, 그는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부모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때, 강간범은 그 부분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잭은 조이만의 자식이다. 좀비가 될뻔한 조이를 살아가게 하고, 마침내 <Room>에서 탈출하게 한다.


조이는 잭을 시체로 위장해 방 밖으로 내보낸다. 여섯 살 아이에겐 너무나 지독하고 혹독한 방식. 몇 번의 위기 끝에 잭은 제대로 된 경찰을 만나고, 경찰은 엄마가 감금된 <Room>을 찾아낸다. 조이는 드디어 진짜 세계로 돌아온다. 평범한 영화였다면 여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강간범과 조이의 두뇌싸움. 탈출 과정의 긴박감. 그렇게 시작되는 아름다운 이야기. 그러나 러닝타임은 그 후로도 한참 더 이어진다. 그건 마치 우리의 삶 같다. 비극이 덮쳤다고 인생이 저절로 끝나버리는 것도 아닌 것처럼. 엉망진창인 채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영화는 그다음을 보여준다.




탈출 직후 처음 하늘을 보게 된 잭. 잭의 이 표정은 정말로 강렬하다. 처음으로 '실재하는 하늘'을 본 아이의 눈동자. 방 안에 갇혀있던 관절에 처음으로 '진짜' 충격이 전해지는 감각. '진짜 세상'이 부딪쳐온다. 의사는 잭에게 마스크를 씌워준다. 바깥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바이러스부터 감염을 막기 위해.


세상의 관심도 마치 바이러스 같다. 기적적인 피해자의 귀환. 응원, 호기심, 온갖 것이 잭의 의지와 상관없이 밀어닥친다. 그것들은 잭을 지켜줄 수도 있지만, 잭을 다치게도 한다. 세계에는 아이스크림도 선물도 선의도 있다. 그리고 세계에는 세균도 바이러스도 범죄도 있다.  <Room>은 범죄의 공간이었지만, 잭에게는 멸균의 장소였다. 그래서 잭은 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조이가 자신의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듯이. 바로 그래서 조이의 아버지는 잭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잭은 범죄의 증거, 비극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애가 태어났을 때 그 남자한테 애를 줄 생각은요? 데려가라고 안 했나요? 예를 들어서 병원에 놓고 오면 누가 데려갈 테니까요."

"왜요?"

"잭이 자유롭게요. 물론 잭을 키운 건 엄청나게 큰 희생이었지만 애가 평범하게 크도록 할 수도 있었잖아요."

"하지만 그에겐 제가 있잖아요."

"그게 잭한테 최선이었을까요?"

- <Room> 중, TV쇼 앵커와 조이의 대화


강간범의 아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짓지도 않은 죄를 반성하며 살아가야 할까. 어쩌면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딸이 이 꼴 된 거 창피하잖아요”

“어떤 모습이어도 넌 내 딸이야.”

“그동안 나 없이도 잘 살았잖아!”

- <Room> 중, 엄마와 조이의 대화

  

조이가 잭의 엄마가 아닌 ‘조이 앤섬’으로 드디어 돌아왔을 때, 조이의 가족들은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했고, 남자 친구와 살고 있었다. 조이가 살던 집은 그대로인 부분도 있었지만 변한 부분도 많았다. 무엇보다 ‘엄마’와 ‘아빠’는 아주 잘 살고 있었다. 그 심정을 상상해본다. 지옥에서 돌아왔을 때, 남겨졌던 사람들을 보는 건 어떤 마음일지. 이 가지런한 일상이 얼마나 큰 상심일지. 물론 남겨진 사람에겐 남겨진 사람의 몫이 있다. 절망 앞에서도 우리는 살아간다. 머지않아 배가 고파질 것이다. 즐겨 먹던 반찬 하나가 생각날지 모른다. 문득 웃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머리로는 안다. 그건 죄가 아니라는 걸. 그러나 또 안다. 내겐 아직 발언권이 없다는 것을. 나는 죽은 줄 알았던 자식도, 먼저 일상으로 돌아와있던 어머니도 아니니까.


사건은 언제나 당사자와 목격자를 가른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 유혹받는다.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떠들고 싶은 충동을. 뉴스에서, 인터넷에서, 우리는 집요한 목격자가 되어 사건의 당사자들을 추측한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저렇게 웃는다니. 그런 일을 겪고도, 잘만 다니네.


너무 큰 비극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모두 살기를 멈추어야 할까. 가끔 상상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일상으로 복귀해야 할 때, 내가 웃어야 할지, 웃어도 될지도. 그때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를 상상해본다.

 

끝내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다.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건 어떻게일지 모른다. 왜라는 질문은 주지 않는 구원. 다시 살아가도 된다는 구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왜를 묻게 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왜, 나인지. 그러나 그 끝에 우리는 항상 어떻게를 기억해야 한다. 어떻게 다시 살아갈지. 어떻게 다시 사랑할지. 잭의 죄는 태어난 것이 아니듯이. 잭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게 죄가 아니듯이. 그의 세계가 계속 이어지듯이.


작가가 자신의 인물들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독자로 하여금 믿게 하려 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의 몸이 아니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몇몇 문장, 혹은 핵심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다. 토마시는 'einmal ist keinmal'이라는 문장에서 태어났다. 테레자는 배 속이 편치 않을 때 나는 꾸르륵 소리에서 태어났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밀란 쿤데라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 단 하나의 문장. 강렬한 인상, 사건을 받아들이는 방식, 세상을 향한 물음. 결국, 존재하는 이야기는 모두 일종의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Room>을 시작하게 한 한 문장은 힘이 세다. 크레딧이 올라가고, 화면이 모두 끝난 이후에도 끈질기게 남아 물어본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사건 이후에, 너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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