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듯 생각하지만, 검증이 필요한 문제를 찾아보자.
내가 가장 욕심내는 것 중의 하나가 공부 욕심이다. 책을 통해서도 배우고, 선배들의 조언 속에서도 배우지만, 제일 즐거운 것은 학교에서 하는 공부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MBA에서 예술경영에 대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무엇인가를 공부한다는 것이 즐겁기도 했지만, 늦깎이 공부는 어렵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11년이나 지나서 쓰는 논문은 낯설기까지 했다. 특히, 학사학위 논문보다 석사 학위 논문을 쓰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예술 관련 분야이다 보니, 국회도서관에 있는 자료를 뒤져봐도 사례 연구위주의 논문이 많았다. 우선, 많이 읽다 보면, 좋은 주제가 떠오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국회도서관과 대학도서관에 있는 논문들을 틈날 때마다 읽었다.
낮에는 공연기획사에서 공연 관련 업무를 하면서, 화요일과 수요일 저녁에만 공부하는 특수대학원이었기에, 시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았다. 4학기까지는 수업 위주의 진행이었고, 5학기 때 논문을 작성하는 시기였다. 논문학기 이전에 주제를 선정하고자 틈틈이 공연 분야에서 거론되는 문제들을 되짚어보기도 하고, 인상 깊었던 칼럼들을 모아두었다.
그런데, 막상 논문학기가 되어 지도교수님과 상의하다 보니, 예상치 못한 문제가 불거졌다. 내가 준비했던 주제들은 공연기획사의 관점에서 바라본 주제였던 것이다. 이를 공연장, 문화재단, 티켓 예매처 등 다양한 관계 단체들의 관점에서 보면, 학위논문으로 작성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던 것이다.
토론 주제로서는 중요한 주제였지만,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할 수 있는 논문 주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30억원 상당의 제작비를 투입하여 준비 중이던 뮤지컬의 사전 제작(Pre-Production) 단계가 마무리되어, 본격적인 제작 단계가 시작되었다. 업무만 하기에도 24시간이 모자랐다. 아쉽지만, 5학기 내에 논문 작성하는 것을 포기하고, 다음 학기로 연기하였다.
그렇게 연기하다가 졸업하지 못하고, 수료로 학업을 마친 선배들이 많아서, 혹시나 포기하게 될까 봐 더욱 걱정이 앞섰다. 내가 처한 상황을 곱씹어보니, 기존의 논문이 사례위주 연구가 많았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주로 회사에서 진행한 사례를 중심으로 작성하는 것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례위주 연구는 논문 심사를 통과하기 어려웠고, 나 역시 석사논문은 가설과 검증 단계를 거친 논문을 쓰고 싶었기에, 갈수록 고민이 커졌다.
그 와중에, 기존에 지도해주시던 교수님의 사정으로 6학기째 논문 지도교수는 내가 직접 섭외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지도교수님을 섭외하는 단계에서부터 생각을 바꾸었다. 비록 젊은 교수일지라도, 공연업계에 종사하는 분이라면, 내가 보지 못하는 문제를 알고 계실 것 같았기에 겸임교수님 중에 온라인 공연 마케팅 수업을 담당하시는 분께 논문지도를 부탁드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논문'이란 무엇일까? 검색해보니, '어떤 문제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 결과를 체계적으로 적은 글'이라고 나온다. 도대체 어떤 문제에 대하여 적어야 하는 것일까?
도무지 알 수 없기에, 벤치마킹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기존의 논문 중에서 공연예술분야가 아닌, 영화산업으로 분야를 바꾸어보았다. 국내에서 공연산업보다 영화산업이 먼저 붐을 일으켰기에, 관련 논문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찾아보니, 영화 관련 논문에서는 사례위주 논문도 있었지만, 연구 논문도 많았다. 닥치는 대로 다른 분야의 논문을 읽다 보니, 공연분야에 접목하고 싶은 주제를 찾았다. 네티즌의 관람 리뷰가 티켓 예매에 미치는 영향을 검증하고 싶었다.
영화, 공연 분야와 같이 티켓 판매가 흥행 성적을 좌우하는 분야에서는 홍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연스레, 기획사 홍보팀의 가장 큰 업무는 주요 일간지 문화부 담당 기자들이 좋은 리뷰를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로 긍정적인 리뷰가 게재된 날에는 티켓 판매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하지만, IT 기술이 발전하면서, 온라인 티켓 예매가 활발해졌고, 기자들의 리뷰보다 실제로 관람한 관객들의 리뷰가 판매에 영향을 미쳤다. 해당 업무를 진행하는 실무자는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기획사 대표들은 네티즌의 리뷰보다 기자들의 리뷰에만 신경 쓸 시기였다. 검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논문을 준비하면서, 위대한 이론을 만들어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큰 실수였던 것이다. 이미 시장 내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일지라도, 검증되지 않았다면, 그것이 좋은 논문의 주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서론과 결론은 나중에 작성하기로 하고, 본론 부분에 집중하였다. 온라인 예매가 차지하는 비중이 오프라인 예매보다 크기 때문에, 기자들의 리뷰보다는 실제 해당 공연을 관람한 네티즌의 리뷰가 티켓 판매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하지만, 설문을 받으러 다닐 시간이 없었다. 공연장을 찾는 관객을 대상으로 설문을 받아야 하는데, 그 시간에 나는 다른 공연장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 온라인으로 설문을 대행해주었고, 논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설문 결과를 받아서, 통계프로그램으로 검증해보니, 예상대로 결론이 도출되었다.
논문의 본론이 완성되고 나니, 나머지 작업은 너무 쉬웠다. 서론과 결론은 2학기 동안 준비하면서 스크랩해 두었던 자료와 느낀 바를 글로 옮기기만 하면 되었다. 그 후, 1차 논문 심사를 통해 보완해야 할 사항들을 찾아내어 무사히 최종 심사까지 통과하였다. 비록, 1학기를 더 투자하였지만, 내가 원했던 논문을 작성할 수 있어서 뿌듯했다.
논문 연구를 통해, 공연산업분야에서 신문사 기자들의 리뷰보다 네티즌의 리뷰가 실제로 티켓 판매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논문을 위한 논문을 쓴 것이 아니라 현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논문을 썼다는 것이 보람찼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배운 것 중에 중요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그것은 현업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곱씹어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분야의 미래를 알고 싶다면, 유관분야의 자료를 살펴보거나, 우리보다 먼저 발전시킨 나라의 자료를 살펴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펼침에 있어서, 직관도 중요하지만 근거가 뒷받침된다면, 무엇보다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늦은 나이지만, 그것을 깨닫고 나니 박사과정에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