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넘는 기간 동안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로 시작하는 글을 쓰자고 제안했다. 마지막 모임을 앞두고 아쉬운 마음이었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배우지 않는다. 경험에 대한 성찰로 배운다.
존 듀이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경험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반드시 사고가 개입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너무 맞는 말이어서 강하게 남았다. 단순히 경험만으로 배운다면 경험이 많은 사람이 가장 많이 배운 사람이 된다. 나이가 많을수록, 같은 나이라도 경험이 다양할수록 많이 배운 사람이 된다. 틀렸다. 군대에서는 짬빱을 똥구멍으로 처먹었냐는 욕을 한다. 계급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할 때 하는 비난이다. 세상에는 나이를 어떻게 먹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른들로 가득하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예외가 아닐 것이다. 성장하고 배우는 것은 단순히 경험의 양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적게 경험하더라도 많이 성찰하면 충분히 배울 수도 있다. 곱씹는 것이다. 글쓰기 모임을 함께 한 동료들은 뭘 곱씹을까? 단순한 호기심은 아닌 것 같다. 뭐라도 배웠길 바라는 초조함일 수도 있겠다. 모임을 주체한 사람이 갖게 된 책임감도 있다. 강의나 코칭을 오랫동안 업으로 해서 생긴 직업병일 수도 있다. 이미 충분히 느끼고 배우고 남은 것들이 있을 텐데, 아쉬울 때 멈추지 못해서 여운을 남기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조금만 더' 해보는 것이 때로는 성취를 만들지만 때로는 피로를 만든다.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떡하나.
1. 작가
두 달 넘는 기간 동안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작가'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했다. 나에게 작가라는 페르소나가 있다는 것이 아직 어색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연극 무대에 오르고 나서도 배우라는 페르소나가 어색했을 때와 비슷하다. 어색함이 익숙함이 되는 것이 성장이다. 이태화 배우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됐던 것처럼 언젠가는 이태화 작가라는 말도 익숙해질 것이다.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반드시 올 미래다.
2. 창작
두 달 넘는 기간 동안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글로 창작하는 행위에 대해 생각했다. 모임 중에 ChatGPT 이야기도 했었다. 사람보다 훨씬 잘 써준다고. 과연 잘 쓰는 게 뭘까? 지금 쓰는 글을 ChatGPT에 넣고 돌리면 뭐가 잘 되는 걸까? 창작을 사랑하는 나는 ChatGPT의 '잘'이 싫다. 나에게는 지금 이 과정이 '잘'이다. 예술 작품의 결과물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결과물에서 결과에만 가치를 둔다면 창작은 의미 없다.
3. 사람
두 달 넘는 기간 동안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글쓴이에 대해 생각했다. 글이 더 사람다웠다. 말보다 더 강력했다. 말은 날아가는데 글은 박힌다. 글을 다시 읽는 것은 글쓴이를 다시 보는 것이었다. 다시 보면 다른 게 보인다. 그렇게 함께 한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됐다. 인공지능이 쓴 글에서는 공허가 보였다. 사람이 쓴 글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