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01
대학로 소나무길 구석 지하 술집이었다. 한 선배 배우가 치사하고 드럽다는 듯 말했다. “이름을 인지도로 바꾸든가 해야지 씨발!” 진실의 빡침이 전해졌다. 연기는 잘하지만 인지도가 없어서 주인공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대학로에서는 꽤 유명했고 소극장 뮤지컬도 여러 작품 했던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대극장 공연은 달랐나 보다. 객석 규모도 다르니 상업적 논리가 우선이었을 테다. 그 선배 인지도로는 객석을 채우기 어려우니 연기는 좀 못해도 인지도가 있는 배우를 캐스팅해야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_02
어느 동네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흔한 호프집이었다. 한 선배에게 물었다. “왜 강사들은 강의 하루 전에 강의가 취소되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걸까요?" 질문이 아니라 하소연이었다. "니가 딱 그만큼의 강사라서 그런 거야!" 맞는 말이었다. 인지도나 실력이나 그땐 그랬다. 유명한 강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미리 계약서도 쓰고, 취소되기는커녕 강사 일정에 맞추려고 애를 쓴다고 했다. 딱 그만큼이라는 말보다 기억에 남는 건 '억울하면 유명해져라'는 거였다.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강사가 되라고 했다.
#_03
요즘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회의실에서 '네임드'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유명한 HR 담당자, 강사, 코치, 컨설팅펌 대표가 거론된다. 말하는 사람이 내 눈치를 볼 때도 있다. 네임드가 아닌 내가 기분 나쁠까 봐 염려하는 눈치다. “00 회사 대표가 네임드 HR을 모셨다며 자랑하더라고요." 라는 얘기도 들었다. 한창 조직개발 이야기를 하다가 00 컨설팅펌 대표를 언급하게 됐을 때, 대뜸 “그분은 엄청 네임드잖아요?!" 라는 리액션도 들었다. 네임드가 아닌 나는 그럴 때마다 멋쩍게 웃었다. '씨발 드러워서 유명해져야겠다'던 선배가 생각났다.
배우가 되겠답시고 서른 살에 대학로로 갔었다. 가끔 건축과 동기 모임에 나가면 '너는 TV에 언제 나오냐?"라고 하던 개념 없는 병신들이 있었다. 그들이 병신처럼 보였던 건 내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지금 똑같은 질문을 들으면 상대가 측은할 것 같다. 유명해지는 것이 성공을 의미하는 직업을 갖고 있으니 충분히 겪을 만한 일이다. 어쨌든 유명세로 보면 배우로서나 강사, 코치, 어떤 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름을 인지도로 바꿔야겠다던 선배는 인지도가 높은 명품 조연이 되었다. 2024년부터 세운 목표는 졸라 인지도 높은 유명한 네임드가 되는 것이다. 올해가 다 저물어가는데 남은 한 달쯤 뭘 하면 목표가 달성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