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수상작인 '아임 유어 맨(I'm your man)'을 보았다.
원래는 딱히 볼 생각이 없었는데,
대학원 '영화와 인문 상담' 수업에서 영화 '그녀(Her)'를 보고 분석하는 과제를 하다 보니,
이 영화가 급 궁금해져서 수업 하루 전에 극장으로 달려갔다.
나에게 맞춤형으로 제작된 이성 AI가 있다면, 나는 과연 그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의 주인공 알마는 바로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궁금해하는 우리 모두를 대신해 직접 체험에 들어간다. 그리고 알마가 느끼는 매 순간의 기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나 또한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요새 영화를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바라보기를 연습하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알마와 완전한 동일시를 경험하고 말았다. OTL
일단 나에게 맞춤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마치 "난 네가 원하는 걸 다 알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그걸 도저히 인정하기 싫어서,
"감히 네가 나에 대해 다 안다고?" 하는 마음에 AI를 더 불퉁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AI는 나에게 끊임없이 열등감을 안겨준다.
나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면서도,
존재 자체가 기계라는 점 때문에, 우리 인간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컴퓨터가 가진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와 분석력 앞에서,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기계 주제에...' 하면서 경멸하고 싶지만, 너무 똑똑해서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AI는 인간처럼 감정적이지 않다.
거기서 또 한 번 무너진다.
나는 수시로 못난 모습을 보이는데, AI는 그런 나를 언제나 받아주고, 또 받아준다.
거기에서 오는 절망도 무지하게 크다.
심지어 나보다 더 인격이 훌륭한 것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악은 이거다.
나를 너무도 완벽하게 만족시켜주기 때문에, 완전하게 의존하고 싶어진다는 거다.
이건 거의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내 모든 욕구가 완벽하게 다 이루어지는, 유아 시절부터 품어왔던 불가능한 환상이 모두 이루어지려 할 때,
알마도, 나도,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이건 삶이 아니다.
나의 고통을 완전히 소거해주는 존재, AI는 그래서 무섭도록 위험하다.
고통이 없는 완전한 행복을 꿈꿔왔건만,
그걸 완벽하게 이뤄줄 수 있는 AI 앞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삶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게 된다.
이건 뭐지?
AI는 우리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결국엔 우리의 기를 죽이고 말 것이다.
왜? 우리에게서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앗아가버릴 것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AI가 절대로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