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에 나를 비춰보다" - (22) 내가 여기 있어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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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 끄트머리에 새로 생긴 등대가 하나 서 있다.

등대는 처음 보는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어느 날 철새들이 찾아와 다른 나라에서 보고 온 것들에 대해 등대에게 이야기 해준다.

그제서야 등대는 깨닫는다.


"아, 그렇구나. 나는 어디에도 갈 수 없구나."



나는 오랫동안 이 부분에 격하게 공감하며 살아왔다.

내가 태생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등대가 철새처럼 돌아다닐 수 없듯이,

나도 나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누구처럼 순발력이 없고,

나는 누구처럼 그림을 잘 그리지 못 하고,

나는 누구처럼 감각적인 대사를 잘 못 쓰고,

나는 누구처럼 몸이 유연하지 않고,

나는 누구처럼 융통성이 없으며,

나는 누구처럼 마음 편하게 지내지 못하며,

나는 누구처럼 기계나 숫자에 능하지 못한 것이다.


때로는 부단히 노력해서 내가 못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잘 해보려고 애쓰기도 했고,

때로는 내가 못하는 것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피해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나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내가 잘 하지 못하는 것, 나의 약점'에 있었다.

늘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왜 이걸 남들만큼 잘하지 못할까, 어떻게 해야 이걸 남들보다 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내게 남은 건 번아웃 되어버린 나 자신뿐이었다.


약점을 채우는 삶은 한계가 명확했다.

그건 끝을 알 수 없는 구멍에 모래를 들이붓는 일과 같았다.

그걸로 나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어느 날 밤, 폭풍우가 몰려온다.

등대는 처음 맞이해보는 엄청난 폭풍에 놀라면서도,

등대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행한다.

폭풍우 속에서 휘청거리는 배들의 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언제나 같은 곳에서 불빛을 비추고 있는, 바로 그 일 말이다.



숙명.


'내가 여기 있어'에 나오는 등대를 보며,

나는 '숙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내가 나로서 태어난 이상, 나만이 감당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

남들이 아니라, 꼭 나여야만 하는 일이 있다.

물론 내가 등대라면, 나와 같은 역할을 하는 등대는 여러 개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각의 등대의 색깔은 또한 고유하다.

세상 어디에도 나 같은 등대는 없는 것이다.




처음으로 내가 '약점을 보완하는 삶'이 아닌,

'강점을 강화하는 삶'을 살고 있음이 알아진다.

이번 삶에서는 온전히 나로서 살 수밖에 없는, 그 숙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왜 하필 등대로 태어났을까'가 아닌,

'등대로 태어난 나는 뭘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 약점은 그냥 나의 색깔이 되어버린다.

고치고 지워야 할 무엇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무늬인 것이다.



흠.

그러고 보니....

괜찮네.

나의 이 독특한 문양, 약점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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