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20주년 기념 영화제
영화 ‘풋노트’ 리뷰
"넌 깊이가 없어!"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가 아니다. 나의 아버지가 내 공연을 보고나서 했던 말이다. 학창 시절, 아버지는 교양의 기본이 되는 클래식 음악은 안 듣고, 서태지 노래만 듣는 나를 무척이나 한심해했다. 자라서 공연 대본을 쓰게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아는 것도 없고 가볍기만 한 네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 나에게 영화 '풋노트'는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비춰볼 수 있는 완벽한 거울이었다.
2011년에 이스라엘에서 제작된 영화 '풋노트(Footnote)'는 대를 이어 탈무드 주석을 연구하는 아버지 슈콜릭과 아들 슈콜릭의 이야기이다. 평생 동안 오로지 탈무드 주석 비교 연구 에만 매달렸으나, 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고집스런 아버지 슈콜릭에 비해, 아들 슈콜릭은 이미 학계의 유명인사로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연구가 가볍고 진지하지 않은, 대중에 영합하는 것이라며 무시한다. 한마디로 학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부자 사이가 좋을 리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 슈콜릭은 16년 만에 드디어 학자의 최고 영예인 이스라엘 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전갈을 받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 상은 원래 아들 슈콜릭에게 수여된 것이었는데, 교육부 비서의 실수로 아버지에게 전화 연락이 간 것이었다는 엄청난 이야기이다.
'남의 허물이 유독 두드러지게 보인다면, 그건 내 안에 똑같은 허물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 슈콜릭이 아들 슈콜릭의 사회적 성취에 대해 보이는 지나칠 정도의 반감은 확실히 비정상적인 측면이 있다. 학자로서 아무리 모자라는 부분이 있더라도 어쨌든 자신의 아들이 아닌가! 아버지 슈콜릭은 아마 인정할 수 없겠지만, 그의 내면에 학문적 명예에 대한 무시무시한 갈망이 숨겨져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러 상황으로 인해 그것을 드러낼 수 없는 입장이기에, 오히려 명예욕의 화신처럼 구는 아들을 더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한편, 아들 슈콜릭의 입장에서 보면, 확실히 억울한 면이 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학문적 명예와 성취에 집착하게 된 동기가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학계로부터 왕따 당하는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나는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아들 슈콜릭이 탈무드 연구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은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그가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고 싶었을 거라고 믿는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너무 과도하게 노력했다는 것 정도?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인정받고 싶었던 단 한 사람, 칭찬받고 싶었던 그 한 사람이 자신을 그토록 무시한다면 얼마나 섭섭하겠는가!
‘컴플렉스’라는 것은 남들은 다 보이는데 자기 자신만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남의 컴플렉스 만큼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화 속 아들 슈콜릭에게 탄복했다. 거대한 컴플렉스 덩어리인 아버지와 그토록 반목하면서도, 끝까지 아버지에게 상을 양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며, 찌질해 보이기만 했던 그의 어딘가에 아버지를 담아낼 수 있는 넓은 품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왔다. 나를 몰라주는 아버지에 대해 분노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터질 것 같은 그 분노를 끝까지 참아내는 것은, 정말 깊은 사랑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위험한 순간은 많았지만, 아들 슈콜릭은 결국 그것을 해냈다. 마찬가지로 아들 슈콜릭의 아들인, 손자 슈콜릭의 말없는 시선 또한 주목할 만 하다.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 아들 슈콜릭이 보기엔 왜 사는지 모르겠는 한심한 손자 슈콜릭 또한 잔소리하고 구박하는 아버지를 말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그도 어쩌면 안으로 안으로 아버지를 품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중은 아닐까?
아버지와 나는 비슷하다. 성격도 그렇고, 생각도 비슷하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하면 아버지는 펄쩍 뛴다. 어디서 감히 너랑 나를 같은 선에 놓고 비교질이냐고 화를 낸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는 정말 비슷하다고 한 번 더 생각한다. 아, 이 글은 결국 또 한 명의 자식이 그 아비에게 쓰는 탄원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