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내 방에 있던 세 가지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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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내 방이 없었다.
아빠가 서예를 쓰시던 방 구석에 작은 책장 하나를 두고,
거기를 내 책상으로 썼다.
왜냐하면 책장에 덮개가 있어서, 그걸 앞으로 꺼내 펴면 책상판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내 방은,
늘 먹향이 가득했다.
먹을 갈아주는 기계에 먹을 꽂은 다음에 전원 버튼을 누르면,
웅웅 소리를 내면서 기계가 저절로 돌아가서 먹이 갈아지곤 했다.
아빠는 한 번 서예를 쓰기 시작하면 엄청 집중하셨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침 꼴깍 소리도 주의하면서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화선지 위로 아빠 붓이 스윽스윽 지나가는 소리랑
내가 조심스레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했었다.
아빠는 다 쓴 습작들을 벽에다 길게 붙여놓곤 하셨는데,
그래서 그 방은 사면이 다 아빠의 서예 습작들로 가득했다.
방으로 바람이 스며들면,
그 종이들이 들썩들썩 하면서 바스락 소리를 내곤 했다.
당시 살던 집은 한옥집이었는데,
그래서 문도 다 미닫이 문이었다.
그것도 유리문이 아니라 나무틀에 한지를 붙인,
그래서 자칫 손가락을 잘못 놀렸다간 문에 구멍이 뽕 뚫릴 수도 있는 그런 문.
오후가 되면 엄마가 그 문을 열고 간식을 들고 들어오셨는데,
그 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아빠도, 나도 한숨 돌리고 잠시 쉴 수 있는 시간.
어린 시절엔 아빠 공부방이랑 같은 공간을 썼기에,
소녀 감성의 나만의 방을 꾸미는 건 중학교에 간 이후에나 가능해졌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은 흰 화선지와 검은 먹물 글씨들이 어우러진 흑백의 풍경이었지만,
그만큼 나름 운치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방의 모든 소리들이 갑자기 그리워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