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엄마" (키티 크라우더 / 논장)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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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메두사의 자존감 문제를 이야기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낼 때만 하더라도, 이 책을 컴퓨터 앞에 내려놓을 때만 하더라도, 엄마가 자식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뜻대로 애를 구속하려 들면 안 되고, 애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지원해줘야 된다는 그런 얘기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리제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온 엄마에게 확 안기면서 처음으로 모자가 벗겨지는 모습이 나온다. 그걸 보면서 깨달았다. 맞다, 그러고 보니 이리제는 평생 모자를 쓰고 살았네? 왜? 어째서? 다시 그림책 초반으로 넘어가 출산 장면을 다시 보았다. 산파가 이리제를 메두사의 뱃속에서 꺼내 안겨주는 순간부터 이리제는 이미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얼마나 기괴한 일인가! 갓 태어난 아이에게 모자를 씌워주는 경우는 없다. 그 아이가 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 때에 춥지 말라고 모자를 씌워주는 거면 모를까, 누가 갓 태어난 아이를 처음 품 안에 안으면서 모자부터 씌울 생각을 한단 말인가!


바로 이거였다. 메두사 하면 뱀 머리, 뱀 머리 하면 메두사다. 뱀 머리는 메두사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가장 또렷한 상징물이고, 몸 전체를 뱀 머리로 휘감고 있는 메두사는 이미 그것을 가릴 수도, 숨길 수도 없는 상태다. 하지만 자신의 딸인 이리제 만큼은 그 정체성을 물려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그림책이 끝날 때야 비로소 이리제도 메두사와 똑같은 뱀 머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아이를 데리러 나온 부모들의 모습만 봐도 그들의 아이와 얼마나 닮았는지 알 수 있다. 노란 얼굴인 아빠와 딸, 컬인 진한 곱슬머리인 엄마와 딸, 똑같은 모자를 쓴 아버지와 아들, 눈매가 똑같이 생긴 아버지와 아들처럼, 메두사와 이리제도 그랬던 것이다.


그럼 이제 메두사가 어째서 이리제에게 평생 모자를 씌우고 살았는지 물어야 할 때다. 나는 그것이 메두사의 상처로 인한 자존감의 손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메두사로 살면서 겪어야 했던 모든 아픔들이 전부 다 이 뱀 머리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원망, 그래서 똑같은 아픔을 이리제가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 이 아이는 나와 다르다, 이 아이는 나같지 않다 라는 것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모자인 셈이다. 메두사가 ‘나’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좋아하고 만족했다면, 이리제가 자기와 똑같은 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그걸 숨길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누가 봐도 자기 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을 것이다. 결국 메두사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메두사가 마을 사람들에게 이리제를 소개하는 장면이었다. 거의 은둔자처럼 생활을 하던 메두사가 어째서 이런 과감한 행보를 보인 것일까? 아마도 이리제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얜 나와 달라요, 얜 반짝이는 진주죠, 이런 아이가 바로 내 딸이에요, 라고 말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엄마들이 자기보다 잘난 자식을 통해 자신의 인정욕을 대신 채우려는 일은 수시로 벌어진다.


하지만 막상 다른 사람도 아닌, 이리제의 출산을 도왔던 산파가 반가움에 이리제를 한 번 안아보려고 했을 때, 메두사가 안 된다며 이리제를 확 숨기는 장면은 산파의 표정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처음엔 그냥 메두사가 이리제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메두사의 자존감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리제의 머리칼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존재인 산파로 인해, 이리제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순간적으로 무서웠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리제를 받아 안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칫해서 모자가 벗겨질 수도 있고 말이다. 이유가 뭐였든 간에 확실히 지나치게 과민하고, 이상한 반응인 건 분명했다. 뭔가 켕기는 부분이 있는 거다. 그리고 그것은 숨기고 싶은 무엇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이리제와 둘만 있는 집에서는 그냥 모자를 벗고 편히 있어도 될 것 같건만, 메두사는 집에서조차 이리제가 모자를 쓰고 있게 한다. 어쩌면 이리제는 자신이 모자를 쓰고 있다는 사실마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으니까 아예 자기 머리라고 생각하는지도. 그 얘긴 메두사는 자기를 닮은 이리제의 모습을 직면할 용기도 없었다는 뜻이 된다. 나를 닮은 내 아이의 모습을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나를 싫어한다? 내 아이와 나는 달라야 한다? 사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게, 메두사의 행동과는 반대로 실제 메두사는 이미 이리제와 자기를 지나치게 동일시하고 있다. 메두사는 메두사, 이리제는 이리제임에도 불구하고, 이리제가 자기와 같은 뱀 머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메두사는, 이리제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자기처럼 상처를 받게 될까봐 겁내고 있기 때문에, 이리제를 밖에 내보내지 않고 본인이 싸고 도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완전히 융합되어 있다. 아마 메두사는 자기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리제를 자기의 분신으로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자기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길 원하는 이 모순된 마음속에서 메두사는 날마다 갈등했을 것이다. 특히 이리제가 크면서 자기만의 독립적인 생각이 자라기 시작하자, 메두사의 갈등은 더더욱 커진다. 이젠 이리제를 사랑하고 이리제의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과 이리제를 독점하고, 이리제를 통제하고 싶어하는 마음 사이의 갈등인 것이다. 드디어 메두사와 이리제 사이의 심리적 독립을 앞둔 균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이 시기를 현명하게 견뎌내지 못해서 아이를 망치는 지름길로 달려가곤 한다. 하지만 일부 현명한 엄마들은 드디어 아이와의 건강한 심리적 독립을 이루기도 한다.


갑자기 솔로몬의 재판이 생각났다. 두 여인이 솔로몬에게 찾아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싸우자, 솔로몬은 그냥 공평하게 아이를 반으로 잘라 나눠가지라고 한다. 그러자 진짜 엄마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냥 저 여자의 자식으로 하고 아이를 자르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게 바로 진짜 사랑이다. 자식을 진짜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엄마만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안은 채 아이가 자신으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는 것을 허용하고 인정해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통해 자기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 있는 엄마의 경우엔,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의 독립이 아니라 아이를 어떻게든 소유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아이가 행복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나에게 소유만 되어 있으면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가짜 엄마다.


고전 평론가 고미숙은 사랑과 소유욕을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했다. “사랑과 소유욕을 구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소유욕이 앞서면 알고 싶지 않다. 그저 가지고 싶을 뿐이다. 알고 싶다면, 그 앎이 자신을 설레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다”라고. 메두사는 늘 이리제를 관찰했다. 이리제의 눈이 항상 어디를 향해 있는지도 알았다. 이리제가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어떨 때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는지, 이리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았다. 메두사는 비록 자신의 욕망과 갈등하고 있는 존재이긴 했어도, 결국엔 자기 자신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엄마였던 것이다.


아마 이 책의 이야기가 메두사가 이리제를 학교에 보내주는 것에서 끝났더라도 나는 메두사에게 충분히 감탄하고, 존경했을 것이다. 그것조차도 현실에서는 정말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메두사가 이리제를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성숙의 단계까지 급 진화를 했다는 사실이다. 학교가 끝나면 모든 부모가 자기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오는데, 자신의 무서운 모습으로 오는 것은 이리제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메두사는 이때 ‘내가 자기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라고 분노하기보다, 혼자 귀가할 이리제가 슬퍼하지 않을 수 있도록 무섭지 않은 모습으로 바꾸고 데리러 가기로 결심한다. 세상 속에 자기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기로 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오직 진실한 사랑만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리제에 대한 사랑이 메두사가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것에서 수용하는 것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왜? 아이는 부모의 일부분이다. 아이는 부모의 DNA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부모가 자신을 싫어하면, 그건 아이의 일부 또한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아이도 자기 자신을 좋아하기 어렵게 되어버린다.


아, 물론 메두사가 머리를 자른 것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한 것이냐, 버린 것이냐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메두사가 아닌 척 하려고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것도 아니고, 모자를 뒤집어쓴 것도 아니고, 그저 길이를 짧게 잘랐을 뿐이니 나는 이것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타인과 화합하기 위해 배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리제가 메두사에게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뛰어오를 때, 이리제의 모자가 드디어 벗겨지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게 된 것이 너무나 멋지다. 이제 앞으론 둘 다 메두사와 메두사의 딸로서 세상 속에서 온전히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아... 이 그림책이 정말 멋진 이야기였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진짜 어마어마한 이야기이다. 키티 크라우더, 리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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