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 있는 궁디팡팡 손. 그 손은 상처받은 마음을 낫게 해주는 신묘한 손이다. 누군가 궁디팡팡 손을 찾아와 자신이 왜 슬프고 속상하고 화가 났는지를 얘기하면, 그 사연을 다 들어준 다음에, 그 속상한 마음을 인정해주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준다. 더 자세하게 표현하자면, 일단은 개그의 소재로도 많이 쓰이는 상담하는 자의 기본 어휘, “그랬구나~ 속상했겠구나~”로 공감해준 후에, 내담자가 다시 안심하고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게끔 큰 시야에서 기운 나는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동물들이 숲에 와서 궁디팡팡 손을 만나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다시 기분이 좋아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 대가로 동물들이 궁디팡팡 손에게 뭔가를 준다는 얘기가 없는 걸 보니 아마도 무료 봉사였던 모양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궁디팡팡 손이 사라진다. 개인적으로 이건 다 무료 봉사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아닌 형체가 있는 그 어떤 존재라면 무료로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면서 영원히 일하는 건 불가능하다. 궁디팡팡 손에게는 궁디팡팡이 필요하지 않으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자세한 이유는 없지만 하여튼 궁디팡팡 손은 사라졌고, 동물들은 모두 절망하며 패닉에 빠진다. 궁디팡팡 손의 존재는 아무리 속상해도 여기만 오면 괜찮아진다는 큰 위로가 되었을 텐데, 그것을 상실하였으니 견디기 힘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심리 상담이 갖는 중독의 위험성을 감지한다. 내담자가 심리 상담가에게 의존을 하게 되면, 그건 제대로 된 심리 상담이 아니다. 힘들 때면 언제든 찾아와서 고민을 토로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가지만, 심리 상담가가 출장을 가거나, 개인 사정으로 못 만나게 되거나, 전업을 하거나 하게 되면, 그 내담자는 멘붕에 빠지게 된다. 그 얘긴 결국 내담자는 혼자서 자신의 아픔을 처리할 수 있는 법을 못 배웠다는 소리가 된다. 자기 혼자서는 어쩌지 못하는 걸 상담가가 대신 처리해주길 바라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다. 심리 상담은 내담자의 마음의 힘을 길러주어서, 상담가가 없이도 혼자서 잘 컨트롤할 수 있게끔 만드는 작업이어야 하지, 상담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실패한 상담이다. 그런 의미에서 궁디팡팡 손이 했던 작업들은 자칫 잘못하면 나쁜 상담가가 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짓이었다.
위로가 위로에서 그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속상해하고, 상처받을 줄만 알지, 왜 자꾸 상처를 받게 되는지 알지 못한다. 토끼는 멋진 케이크를 만들어서 엄마 생일에 드리고 싶었지만 막판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잘해서 인정받고 싶었는데, 실패해서 자학을 하는 중이었다. 이때 궁디팡팡 손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1) 마음처럼 되지 않아 속상했겠구나 2) 그래도 엄마는 너를 대견하게 여기실 거야. 여기까지만 얘기를 하고 끝내버리면, 토끼는 다음번에도 엄마가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길 바라며 뭔가를 할 것이고, 그러다 자기 마음처럼 되지 않으면 또 속상해할 것이다.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만다. 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이다.
토끼한테는 여전히 성공해서 엄마한테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그대로 있다. 이번 실수는 속상하게 됐지만, 다음번엔 꼭 성공하려고 할 뿐, 엄마는 토끼가 어떤 행동을 잘 하든 못 하든 토끼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자신의 성공 여부가 엄마에게 사랑을 받는데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걸, 그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다. 그걸 알아야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걸 멈출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궁디팡팡 손이 해준 위로는 “이번엔 안 됐지만, 다음엔 잘 될 거야. 열심히 또 노력해봐.”라는 소리밖엔 되지 않는다. 그게 토끼가 듣고 싶었던 답이었는지는 모르나, 그것 가지고는 토끼는 자신의 행동이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고, 토끼의 삶이 성장하고 변화하지도 않는다.
하마가 작은 새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이게 되자, 궁디팡팡 손은 “아냐, 넌 투실투실 귀엽고 마음이 따뜻한 걸.”이라고 위로해준다. 작은 새가 하마의 매력을 잘 못 본 것이라고 말해주는 셈이다. 하지만 이 다음에 하마가 또 다른 동물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차이게 됐다고 치자. 그럼 그때도 이렇게 위로해줄 것인가? 그럼 하마는 궁디팡팡 손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이때는 어째서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 다른지에 대해서 알려줘야 한다. 서로 다른 배경에서 서로 다른 가치관으로 자라났기 때문에, 서로 원하는 것이 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 거절 당했다는 자체가 내가 어디가 못났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 다른 누군가에겐 하마가 아주 멋진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줘야 한다. 그래야만 행여 또 차이더라도, 아, 이 친구가 원하는 요소가 내가 가진 거랑 좀 다른 모양이군, 하고 스스로 마음을 단속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핵심은 다음번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길 때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반복해서 알려주는 것이다.
하지만 궁디팡팡 손의 방식은 말 그대로 싸구려 위로에 불과하기 때문에, 동물들은 순간적으로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줄 서서 궁디팡팡 손을 찾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궁디팡팡 손에 대한 의존도만 높일 뿐이다. 궁디팡팡 손의 상담에는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 감정적인 위로와 공감, “괜찮아, 괜찮아, 궁디팡팡” 아무리 상처받고 쓰라리게 아파도, 괜찮아, 괜찮아. 이래버리니 안 괜찮을 때마다 궁디팡팡 손을 찾아오는 것이다. 궁디팡팡 손은 스스로 일거리를 만들고 있는 셈이다. 만약 그게 단골을 만들려는 의도라면 성공한 것이겠지만.
내 맘대로 옷을 입고 싶은데 못 입게 해서 속상했다, 나 혼자 다 먹고 싶은데 나눠먹으라고 해서 화났다, 내 그림 보고 별로라고 해서 슬펐다, 동생이 잘못했는데 나를 혼내서 억울했다, 사실 이런 고민들은 굉장히 유아적인 고민이다. 뭐든지 내 뜻대로 하고 싶고,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 싶어하고, 반면에 배려나 책임, 관용 같은 더 높은 가치는 아직 모르는 단계다. 상처받은 마음을 공감해주고 위로한 후에는, 반드시 이들이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납득시킬 필요가 있다. 머리가 빠진 채 가슴만 다독거려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궁디팡팡 손을 만나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동물들의 모습을 보라.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한다. 오직 궁디팡팡 손이 뭔가를 해주기만을 기대하고 있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게다가 지난번에 왔던 소녀가 또 와서 줄을 서 있다. 물론 단 한 번 상담해줬다고 확 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게 계속 반복된다면 그건 뭔가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원래 오늘의 그림책으로 이 ‘궁디팡팡’을 선택한 이유는 집단 상담에서 내담자들이 리더에게만 의존하지 않고, 서로서로 치유를 주고받는 주체로 서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하는 수업 중에서 ‘글쓰기에 나를 비춰보다’ 수업이 그랬었다. 비슷하지만 약간씩 다른 아픔을 지닌, 서로 다른 나이대의 세 명의 여자가 함께 울면서 서로의 아픔을 솔직하게 공유하고, 그 고통을 통해 자신이 어렵게 깨달은 지혜들을 나누며, 자기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조심스레 건네면서, 그 어떤 전문적인 조언보다도 가슴에 와닿는 진심들을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끝나고 나서 서로 악수하고 안아주는 모습들을 보면서 내가 소외감을 느낄 정도로 무척 돈독해진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때 ‘그래, 이게 진짜 치유지!’ 하는 생각을 했고, 그림책 ‘궁디팡팡’에 나오는 동물들끼리 둘러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서로서로 다독이는 모습이 딱 이와 같은 예시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다시 보니 생각이 좀 달라졌다. 궁디팡팡 손이 하던, 궁극적으로 인지 패턴과 행동을 바꾸지 못하는 싸구려 위로를 동물들이 서로서로에게 해준다고 해서 무슨 변화가 있겠나 싶은 회의가 드는 것이다. 친구들끼리 앉아서 각자의 사연을 하소연하듯이 늘어놓고, “아유, 힘들어서 어쩐대니?”, “그 나쁜 놈은 왜 그랬대니?”, “많이 속상했겠다!”를 서로에게 해준들, 그래서 뭐, 어쩌라구. 집에 가면 또 똑같은 상황을 경험할 것이고, 그때마다 모여서 괜찮아, 괜찮아를 해줘서 잠시 기분이 좋아진들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얘기다.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내가 자꾸만 속상한 기분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남들이 나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속상한 게 아니라, 항상 내가 바라는 대로 되길 원하는 건 아닌지, 그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그걸 봐야 한다. 근본적인 내 문제의 패턴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