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슬개 존 브라운은 남편과 사별한 로즈 할머니의 사랑을 독점하며 살고 있었다. 로즈 할머니가 “존 브라운, 너랑 나랑 둘만 있으면 돼.”라고 말할 정도로 둘의 관계는 돈독했고, 편안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 할머니는 창 밖에서 고양이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 존 브라운의 첫 반응이 정말 재밌다. 로즈 할머니가 “존 브라운, 저기 정원에 있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존 브라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되어 있다. 할머니가 분명히 묻는 소리를 들었지만 ‘안 들리는 척’을 한 것이다. 나의 행복한 일상이 깨질지도 모르는 새로운 위협 앞에서 있어도 없는 척, 들었어도 못 들은 척, 봤지만 못 본 척, 부정을 하는 것이다. 마치 그러면 고양이가 알아서 저절로 없어질 것처럼 말이다. 스트레스 상황과 마주했을 때 보이는 전형적인 회피의 방어기제다. 하지만 있는 걸 없는 척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너무 당연한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존 브라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기를 바란다. 뻔히 있는 문제를 외면함으로써 자기 손 안 대고 저절로 문제가 사라지길 원하는 건데, 이거야말로 헛된 희망, 헛된 기대이다. 그런 일은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인 존 브라운은 회피하기를 멈추고, 직접 행동에 나선다. 존 브라운은 집 주위를 빙 둘러 금을 그은 다음, 도둑고양이를 직접 만나서 “우린 너 필요 없어. 할머니랑 나는 둘이서 잘 지내고 있단 말야.”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고양이를 찾는 로즈 할머니의 요구를 무시하기 시작한다. 그 적대감이 너무도 분명한 나머지, 로즈 할머니도 이제 눈치를 챈다. 하지만 존 브라운의 기대와는 다르게, 로즈 할머니는 도둑고양이에게 쏠리는 관심을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존 브라운의 눈을 피해 몰래 도둑고양이에게 우유를 준다. 그러면 이번에는 존 브라운이 로즈 할머니 몰래 그 우유를 엎어버린다. 그리고 급기야는 할머니가 창 밖을 보지 못하게 커튼까지 쳐버린다.
두 사람의 행복한 밀월 관계는 끝나버렸다.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있는 것이 행복하지 않다. 왜? 존 브라운과 로즈 할머니가 다른 것을 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존 브라운은 로즈 할머니와 단 둘이 지금처럼 지내고 싶어했고, 로즈 할머니는 새로운 동물을 집에 들이고 싶어했다. 이 두 가지 욕구는 너무도 상반되는 것이어서, 존 브라운의 뜻대로 되려면 할머니가 불행해져야 하고, 로즈 할머니의 뜻대로 되면 존 브라운이 불행해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 브라운이 이 모든 게 다 갑자기 나타난 도둑고양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언뜻 보기에 너무 당연해 보인다. 도둑고양이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럴까? 모든 것이 다 도둑고양이 때문일까?
어쩌면 도둑고양이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로즈 할머니는 존 브라운과 둘이서만 지내는 생활이 지겨웠을 수도 있다. 로즈 할머니는 사랑이 많은 사람인데, 존 브라운 하나로는 성에 안 찰 수도 있고, 더 다양하고 다채로운, 정신없고, 활력 넘치는 삶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도둑고양이의 출현으로 인해 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꼭 도둑고양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무엇인가가 나타났어도 똑같은 현상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존 브라운은 완벽하게 만족했지만, 로즈 할머니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존 브라운이 자기 욕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로즈 할머니의 모든 욕구를 차단하는 방식을 보라. 과연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답하지 않고, 막고, 방해하고, 차단하고, 거부하고... 자기 욕구를 위해 남의 욕구를 그렇게까지 무참히 짓밟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로즈 할머니가 병나서 앓아 눕는 게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물론 진짜 병이 난 건지, 아니면 존 브라운의 버릇을 고치려고 꾀병을 부리는 건지는 차치하더라도) 자기 욕구가 중요하면, 타인의 욕구도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존 브라운은 자기 뜻대로 하는 게 로즈 할머니에게도 좋은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건 사실 ‘나’를 위한 것일 뿐이다.
로즈 할머니가 앓아 눕자 당장 존 브라운의 일상에도 빨간불이 켜진다. 밥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할머니와 함께 했던 모든 일상이 정지되었다. 존 브라운은 그제서야 도둑고양이를 못 들어오게 했다가는, 자신이 좋아했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좋아했던 것은 로즈 할머니와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었는데, 로즈 할머니의 욕구를 다 좌절시켜버리자, 더 이상 그것을 누릴 수 없게 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도둑고양이 때문이 아니었다. 할머니에게 변하지 않을 것을 강요한 존 브라운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는 이때의 존 브라운의 심정에 대해 생각해본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어떻게 해도 얻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무력감, 분노, 상실, 원망, 미움, 슬픔, 외로움, 괴로움...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하고 무력까지 행사해 봐도, 타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안 되는 걸 되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 존 브라운은 괴로울 수밖에 없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욕구만 충족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변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영원히 이대로 똑같이 살고 싶어하는 불가능한 꿈을 꿨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존 브라운은 하루종일 곰곰이 생각했다고 한다. 과연 이때 그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뭣이 중헌디?”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진짜 바라는 것, 혹은 고양이를 못 들어오게 막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로즈 할머니였을 것이다. 로즈 할머니와 행복한 관계를 맺는 것, 로즈 할머니와 영원히 함께 있는 것, 또는 로즈 할머니가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 그것이 ‘로즈 할머니와 지금처럼 둘만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존 브라운은 할머니의 병으로 인해 자아 성찰을 한 셈이다.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것,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 깨닫게 되었다.
결국 자기 손으로 도둑고양이를 집 안으로 들이는 존 브라운. 그제서야 자신이 그토록 바랐던 일상을 회복한다. 도둑고양이를 들이는 것이 그가 무작정 두려워했던 것보다 별 게 아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저 일상의 작은 변화에 불과했다. 그리고 어쩌면 더 좋은 변화일 수도 있고. 도둑고양이가 아니었어도 다른 동물이 계속 나타날 수도 있는 거고. 만약 존 브라운이 계속해서 로즈 할머니를 ‘독점’하는 것에만 포인트를 맞췄다면, 존 브라운은 아마 영원히 불행의 나락에 떨어졌을 것이다. 도둑고양이를 들이지 않아도 불행하고, 도둑고양이를 들여도 불행했을 것이다. 덩달아 로즈 할머니도 불행해졌을 것이고, 어쩌면 존 브라운을 내쫓거나 버리는 두 사람 모두에게 최악인 파국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파국으로 치닫고 마는 관계들도 정말 많고.
나는 존 브라운이 굉장히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 선택을 했다. 더 큰 시각에서, 더 긴 시각에서 지금 일을 보았고, 더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놓을 줄 알았다. 존 브라운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똑똑한 개다. 다만 한 순간 소유욕과 집착에 눈이 멀어서 난리를 쳤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