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생쥐가 바다를 보러 가겠다고 부모님께 말했다. 당연히 생쥐 부모는 결사반대. 이유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절대 안 돼!” 우리에겐 굉장히 익숙한 레파토리이다. 생쥐 부모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세상은 무서운 곳인 게 맞다. 특히 꼬마 생쥐에게는 더더욱 크고 위협적이고, 위험한 곳인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위험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무서운 곳엔 가지 말아야 하는가? 무섭고 위험한 것을 도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피해야 하는가? 꼬마 생쥐가 몇 살이 되면 가능한가? 생쥐 부모만큼 자라고 나면 가능한가? 아니, 언젠간 정말 가능해지기는 하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런 물음에 명확하게 답을 해줄 수 없다. 어른이 되어도 세상이 무섭고 위험한 곳인 건 똑같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런 곳으로 보는 시선을 갖고 있는 한, 몸집이 커졌다고, 경험치가 쌓였다고 해서 두려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험에 대한 면역력이 없어서 밖에 나가는 것이 더 어려워질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위험한 곳이 맞다.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 나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데 말이다.
이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 목표, 자기 욕망, 자기 의지이다. 꼬마 생쥐는 이렇게 말한다. “전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여지껏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잖아요! 아무도 내 마음을 바꿀 순 없어요.” 바다를 너무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마음. 그것이 세상에 대한 공포, 두려움도 감수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바다를 볼 수만 있다면, 그깟 위험쯤은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물론 여기엔 무경험으로 인한 꼬마 생쥐의 무모한 용기가 한 몫을 한다. 꼬마 생쥐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솔직히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니까 감히 그딴 건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떠나기 전에 생명의 위협을 한 번이라도 느껴봤다면, 아마 지금처럼 당당하게 선포할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세상의 무서움을 살짝 맛을 본 뒤라고 해도,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고 간절하다면? 두 개의 마음,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과 세상이 두려운 마음을 저울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때는 어느 쪽으로든 마음이 더 크고 무거운 쪽으로 결국 행동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하냐가 아니다. 세상은 원래부터 위험했다. 그게 세상의 기본값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진짜 중요한 건, 내가 무언가를 얼마나 간절히 하고 싶으냐이다.
생쥐 부모는 단호한 꼬마 생쥐 앞에서 한숨을 쉬며 바다로 떠나는 걸 허락한다. 이때 그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이라고는 고작 “조심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함께 가서 도와줄 수도 없고, 못 가게 할 수도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시켜서 믿고 내보낼 수밖에. 이처럼 자식의 단호한 결의 앞에선 부모가 끝까지 막을 도리가 없다. 왜? 자식은 성장하는 에너지 덩어리, 생명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늘 팽창하고 뻗어나가려고 하는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걱정과 염려가 과하면, 아이의 에너지를, 생기를, 의욕을, 성장욕구를 억눌러서 결국 시들게 만들고 만다. 두려움 때문에 생명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다만 부모의 걱정은 현실화가 된다. 이 또한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 맞다. 그러니 자신에게만 특별한 요행이나 행운을 바라면서 나는 안전하겠지, 라고 헛된 기대를 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무서운 곳이라고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왔다면, 무서운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도 나는 괜찮지 않을까? 잘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꼬마 생쥐는 고양이에게 꼬리를 뜯기고, 새떼와 개떼한테 공격을 당했고, 몇 번이나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힘도 빠지고 겁에 질리고 만다. 이게 냉혹한 현실이다. 이 무서운 세상 속에서 당신은 그렇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이 정도 당하고 나면, 아마도 ‘내가 미쳤지, 우리 부모님 말씀이 다 맞았구나’ 싶을 거고, 자신이 헛꿈을 꿨던 것을 후회할 것이고, 더는 바다를 갈 의욕조차 꺾일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에서 멈추기도 한다.
그러니까 처음엔 그저 말로만 두려움을 경험하다가, 이젠 몸으로 직접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게 끔찍해서, 그렇게 될까봐 미리 주저앉아 버린다. 그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것 자체가 끔찍해서,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아서,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을 택한다. 그러면서 실제로 모험을 하려다가 요절하거나 자포자기한 케이스들을 언급하며, 역시 아무것도 안 하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안 한 게 오히려 잘한 선택이었다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위험을 뚫고 나간 사람들은 결국 바다를 만나고야 만다. 꼬마 생쥐는 부모도 보지 못한 바다를 직접 보게 된다. 어려움과 직면한다고 해서 모두가 죽는 건 아니다. 게다가 바다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이기고, 위험을 겪어내고 결국 바다를 본 경험이 있는 자는, 세상의 어려움은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는 걸 배우게 된다. 무섭지만 어떻게든 견딜 수도 있고, 통과할 수도 있고, 그걸 겪어낼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제 꼬마 생쥐는 무모한 용기가 아니라 진정한 용기를 갖게 되었다. 바다를 본 자의 만족감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고,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모험의 진정한 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힘이라는 게 있다.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다. 어려움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견뎌내고 통과해냈을 때만 얻을 수 있는 놀라운 깨달음이 있다. 딱 한 번만 해보면 된다. 꼬마 생쥐처럼 생명의 위협을 통과해서 굳이 먼 바다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갖 두려움 중에서 아주 작은 것 하나를 골라서, 그걸 극복해보는 연습을 해볼 필요가 있다. 해보니 괜찮네, 별 거 아니네, 할 수 있겠네, 이런 느낌을 직접 경험해야지만 그 다음 두려움에 도전해볼 용기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안전한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천변만화하는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 그대로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섭고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가장 위험한 것이다. 정체되어 있는 삶, 고인 물처럼 두려움에 썩어가는 삶, 해본 게 아무것도 없어서 온통 모르는 것뿐인 삶이 어떻게 안전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내가 가진 생명 에너지에 가장 해가 되는 무서운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