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지 않으면" (서한얼 / 보림)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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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라는 이름의 소녀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모자를 쓰고 걸어가다가, 바람을 만난다. 바람결에 모자가 날아가 버리자, 소녀는 모자를 잡기 위해 악착같이 쫓아다닌다. 그러면서 너무 짜증이 나서 “바람 따위는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악을 쓴다. 그러자 슬퍼진 바람이 뚝 하고 멈췄고, 그제서야 봄이는 자신의 모자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바람이 정말 사람의 말을 듣고 슬퍼하는지, 사람의 명령에 따라 멈출 수도 있는지, 그런 건 일단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우선은 봄이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봄이의 세계는 봄이 자신, 그리고 봄이가 아끼는 물건, 이렇게 되어있다. 그게 전부고, 따라서 그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 봄이에게 자신의 소중한 모자를 앗아갈 수도 있는 바람은 ‘악’이고, ‘적’이고, 따라서 없어지면 좋을 것이다. 봄이는 바람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으므로, 그것을 지키는데 방해가 되는 바람 따위는 거추장스럽고, 쓸데없고, 필요 없는, 나쁜 것이다. 바람만 불지 않으면, 바람만 없어져버리면, 봄이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악다구니를 부렸고, 천만다행으로 바람이 멈추었다. 그래서 봄이는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젠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는 일 따윈 없을 테니까. 여기까지가 봄이의 좁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봄이의 세계에선 모든 일이 형통해진 것으로 결론이 난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봄이가 모르는 세계, 타인의 세계, 그리고 더 큰 세계에서는 바람이 멈춘 것이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바람이 없으니 연을 날릴 수 없게 되었고, 바람으로 풍차를 돌리며 생활을 해결하던 마을도 멈춰버린다. 배들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그러니 사람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완전히 멈춰버리자, 그로 인해 돌아가던 많은 일들도 일시에 멈춰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봄이의 좁은 세계에게까지도 영향을 끼치게 되어, 봄이마저도 바람이 멈추면 어떻게 되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여기서 봄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무엇일까? 바람은 봄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다. 봄이는 바람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소중한 모자를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조롱하고, 놀리고, 울게 만들려고 하는 못된 바람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봄이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모든 것을 자기 기준에서 해석하기 때문에, 바람의 실제 속성과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봄이의 눈에 바람이 그렇게 보이고 느껴졌을 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팩트는 어떤가? 바람은 그저 자신의 조건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일 뿐이다. 바람의 의도는 없다. 그저 공기의 기압과 흐름을 따라 저절로 생성되었다가 소멸되길 반복한다. 그걸 인간이 자기 관점에서 해석할 뿐이다. 그리고 내가 기분 좋을 때 부는 바람은 시원하고 좋지만, 내가 원치 않을 때 부는 바람은 귀찮고 짜증스러운 것이다. 바람에 시원한 바람, 짜증스러운 바람 기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도움이 될 때 불어오면 좋은 바람이고, 내가 하려는 일에 방해가 되면 나쁜 바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건 엄연히 내 문제다. 바람의 문제가 결코 아닌 것이다. 봄이가 그것까지 깨달았는지는 의문이지만, 최소한 바람이 나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은 알았던 것 같다. 어린 생각에도 나만을 위해서 바람을 멈추는 것이 남들을 위해선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 바람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원치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필요할 수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우리가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는 뜻일 테니까.


개인적인 해석, 자의적인 해석, 자기 위주의 해석, 자기 식대로의 해석, 뭐라고 표현하건 간에,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자기 관점으로 타인과 세상을 보는 방식엔 오류가 가득하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과 감정에 따라, 자기의 이해득실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에 따라 옳고 그름이 정해진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인지 오류이다. 왜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가? 왜 세상이 나를 위해 돌아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실제로 세상이 그렇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괴로움과 고통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생일대의 착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봄이의 착각은 아직 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바람을 멈춘 것이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람을 자신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고, 불라고 하면 부는 그런 존재인 것처럼 잘못 알고 있다. 봄이한테는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바람이 과연 봄이가 “바람 따위는 없었으면 좋겠어!”라고 악을 썼기 때문에 슬퍼서 멈춘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연히 멈췄겠지. 그냥 멈출 때가 돼서 멈춘 것이다. 마찬가지로 봄이가 “바람아, 미안해. 네가 필요해”라고 말했기 때문에 바람이 기뻐서 다시 되돌아온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마침 불어야 할 조건이 됐기 때문에 다시 분 것뿐이다. 모든 것은 봄이의 오해와 착각이다.


이것이 어쩌면 세상에 대한 가장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내가 어찌할 수 없이, 나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저 자연의 원리, 섭리에 따라 저절로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수레바퀴라는 것. 그 안의 내가 꽤나 중요한 존재인 것 같지만, 혹은 꽤나 중요한 존재이길 원하지만, 어쩌면 우주에서 보기엔 길가의 풀꽃이 가지고 있는 존재감이나 인간의 존재감이나 똑같은 무게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중요한 존재,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진정으로 화합하고 자연과 하나가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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