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책 ‘책 먹는 여우’를 처음 읽었을 때, 도서관이나 서점의 책을 훔쳐서 먹어치우는 주제에 도덕성도 죄책감도 없이 자기 변명만 일삼는 여우가 내 분노를 엄청나게 유발했던 기억이 난다. 전혀 좋아할 수 없는 주인공, 그 어떤 이유로도 납득할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짓을 한 범죄자였기에,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좋은 결말을 맺는 것까지도 맘에 들지 않았었다. 나에게 여우는 인면수심의 용서할 수 없는 자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다시 읽어본 ‘책 먹는 여우’에서 나는 여우의 ‘허기’에 주목하게 되었다. 여우는 아무리 많은 책을 읽고 먹고 또 읽고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먹으면 먹을수록 더 배가 고팠다. 그걸 일종의 ‘결핍’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어렸을 때 극심하게 굶고 자라 음식에 대한 거대한 결핍이 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에 대한 집착도 상대적으로 훨씬 더 크다. 늘 음식을 갈구하고, 보면 환장하고, 그렇게까지 많이 먹을 필요가 없는데도 나중에 소화제를 먹을지언정 일단 뱃속에 꽉꽉 채워두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혹은 폭식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정서적인 결핍을 음식으로 채우려는 경우에도, 통제가 안 되고 과도하게 먹는 경향이 나타난다. 음식 자체는 자신의 위가 허락하는 양 정도로 먹으면 충분하다고 몸에서 싸인이 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음식을 탐하는 이유가 육체적 허기가 아닌 정서적 결핍인 경우엔, 한계를 모르고 추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여우의 허기, 여우의 결핍은 무엇이었을까? 이번에 책을 보면서 처음으로 눈치챈 것인데, 여우는 다른 사람들의 책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배가 부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늘 날씬한 상태이다. 하지만 감옥에서 자기 자신이 쓴 책을 읽었을 때는 몸이 거의 풍선처럼 부풀어올라서, 확실하게 배가 부른 모습을 보여준다. 여우가 2주 동안 쓴 책의 분량이 900페이지가 넘기 때문이어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도 다른 책들을 수십 권을 읽었지만 여우는 한 번도 그렇게까지 배부른 적이 없었다. 결국 여우의 결핍은 자기 이야기, 즉 ‘나의 서사’에 대한 결핍이었을지도 모른다. 남의 이야기를 그토록 많이 읽었던 것은 내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그걸 다른 이들의 이야기로 대신 채우려는 의도였으나, 실제로 남의 이야기로는 전혀 배가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남의 이야기들을 많이 볼수록 더 더 더 배가 고파졌던 거다. 왜? 여우가 진짜 원하는 건 자기 자신의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들도 다 팔고, 나중엔 양심까지 팔면서 남의 이야기를 미친 듯이 먹어치웠으나, 여우의 형편은 전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남의 이야기를 먹지 못하게 되는 최악의 형벌까지 받게 된 것이다. 그때 놀라운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남의 이야기로 대신 배를 채우는 행위를 강제로 금지 당하자, 그제서야 여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의 이야기를 어떻게 해서든 입수하고, 먹을 수 있을 때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남의 이야기를 더 먹을 생각만 했지, 자기 자신 안에 이미 이야기가 가득 차 있으며, 그것을 쓰면 앞으로 자급자족이 되면서 언제나 내 이야기를 충분히 먹을 수 있다는 상상조차 못 한 것이다. 이처럼 대리만족할 수 있는 대상, 대신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이상,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다. 그러다가 모든 걸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구절은 ‘자기가 쓴 책들이 특별히 맛있었’기 때문에 이젠 돈이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책을 많이 살 필요가 없어졌다는 부분이었다. 그동안 여우가 특별히 맛있게 읽은 책들은 한 마디로 명작들이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누가 봐도 멋진 책들 말이다. 하지만 여우는 결국 자기 이야기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책을 먹고 싶어서 별의별 짓을 다 하다가, 결국 자동 글 기계까지 훔치려고 하는 어리석은 도둑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니까 그렇다. 다른 책들보다 문장이 유려하지 않을 수도 있고, 구성이 어설플 수도 있고, 주제가 별로 훌륭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그것이 내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중하고 훨씬 더 가치가 있다. 한 마디로 제일 맛있다! 나 역시 첫 책, ‘마음이 하찮니’를 출간하고 나서, 내 책이 제일 재밌다는 얘길 많이 하고 다녔다. 과도한 자신감이나 자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 이야기라서, 내가 제일 잘 아는 이야기니까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계속 재밌는 거였다.
‘책 먹는 여우’를 보는 누군가도 자신이 엄청나게 집착하고, 갈구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내가 왜 그것에 목을 매달고 있는지를 잘 들여다봐야 한다. 여우처럼 그 참을 수 없는 욕망 안에, 자신의 진짜 소망이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모른 채, 내가 원하는 건 이거야, 저거야, 하는 식으로 대리 만족으로 그치고 있는 건 아닌지 잘 따져보길 바란다. 내 인생에서 더 이상 아무런 핑계를 댈 수 없을 때, 그 무엇으로도 대리 만족이 되지 않을 때, 바로 그 순간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직면하고,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생기게 된다. 그러니 현재 누리고 있는 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내가 가진 게 없어져봐야 비로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투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니 말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고,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노래를 부르고 싶은 마음이 있고, 자수성가한 사업가를 부러워하는 사람에게는 자기 사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전 세계를 탐험하는 여행가를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자신도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그걸 나도 가지려고만 하지 말고, 실제로 한 번 해보는 건 어떨까? 그 사람처럼 잘하지 못할까봐,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잘 하지 못할까봐 겁나서 포기하지 말고, 그냥 한 번 도전해보면 어떨까? 그 간질간질하고 미칠 것 같은 마음의 소리에 못 이기는 척 하고 한 번 넘어가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