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너구리" ('너도 화가 났어?'/톤 텔레헨)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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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는 해가 지는 것을 싫어한다. 너구리는 해가 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 매번 저녁마다 해가 지는 게 너무 너무 싫어서 화가 나고,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가지 말라고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한다. 일단 너구리는 태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태양은 동물과 달리 그저 정해진 궤도를 정해진 속도로 늘 똑같이 이동하는 천체의 행성 중 하나일 뿐이다. 태양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기분이 좋으면 안 가기도 하고, 기분이 나쁘면 일찍 가버리기도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너구리는 그 사실을 모른다. 자기는 그럴 수 있기 때문에, 태양도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다 자기 같은 줄 안다. 한 마디로 너구리는 태양에 대해 무지하다. 태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태양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왜 저렇게 반복적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기능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길 바랄 뿐이다. 마치 그것이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미친 거 아냐?’는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너무도 몰상식하고, 비상식적이며, 어이없는 행동을 당연한 듯이 할 때)


하지만 태양은 너구리의 소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때가 되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행동은 너구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얘기지만, 너구리는 이것은 매우 사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태양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생각이라고 쓰고 ‘망상’이라고 읽는다.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은 완벽하게 접어둔 채로, 오로지 내 맘대로, 제멋대로 상상하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 너구리가 하는 혼잣말이 아주 예술이다. ‘한 번 정도는 지지 않고 그대로 있어도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잖아.’ 자신이 태양에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태양이 마음만 있으면 그 정도쯤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왜? 자기는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자기라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기 때문에. 자기한테는 그게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너구리는 태양을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굉장히 당연한 얘기다. 태양과 너구리는 전혀 다른 존재니까)


우리는 생활 속에서 이런 식의 말을 정말 많이 듣는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니잖아.” 사업에 망한 형이 동생을 찾아와 돈을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가족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여자 친구가 남자 친구에게 매일 퇴근하고 자기를 데리러 와달라고 요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한다면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냐?" 남편이 애 셋을 하루종일 혼자 돌보다 넋이 나가 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편이 하루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해서 집에 오면 깨끗하게 정돈된 집에서 따뜻한 밥 정도는 조용히 먹을 수 있는 권리 정도는 있는 거 아니야? 이게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건가?" 엄마가 자식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다른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해주는 밥 먹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걸 상대방이 들어주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 내가 원하는 건 엄청나게 크거나, 대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 정도는 들어줄 수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강요. 그렇지 않으면 넌 정말 몹쓸 인간이라고 몰아버리는 착각. 이게 진짜 무서운 거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지는 언제 알 수 있느냐, 본인이 당해보면 안다. 상대가 말도 안 되는 걸 이유로 들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어떤 것을 요구해올 때, 그 당혹스러운 심정을 느껴봐야 한다. 물론 그때라도 자기 행동을 되돌아볼 수 있다면 성숙한 사람인 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 때조차 별의별 핑계를 다 대면서 자기들의 요구는 지극히 정당하고, 상대방의 요구는 미친 거라고 한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너구리는 이런 망상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좀 더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운다. 태양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궁리하는 것이다. 화를 더 크게 낸다거나, 무섭게 위협을 한다거나, 발로 차버리는 폭력을 행사해서 강제로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멀리 떠난다고 거짓 협박을 하는 게 어떨까 하고 아주 구체적인 생각으로 들어간다. 이 생각이 무서운 이유는, 자기가 태양에게 요구하는 사안이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일말의 고려도 없이, 어떻게든 태양이 자기 뜻대로 하게끔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막무가내식의 사고가 들어있다. 왜, 어째서 태양이 너구리의 말을 들어야 하는가? 왜, 어째서 태양이 너구리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욕을 먹고, 폭력을 당하고, 협박을 당해야 하는가? 너구리에겐 어째서 이 모든 것이 이토록 당당하고 당연한가? 첫 페이지 마지막 줄에 그 힌트가 나온다. ‘그러면 태양이 비출 친구가 없을 테니까’. 너구리에겐 친구가 하나도 없다. 오직 태양만이 친구다. 그래서 너구리는 태양에게도 친구가 자기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좁은 세상에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사는 사람일수록 이런 엄청난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아는 거라곤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남들도 다 자기와 같을 거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남들은 자기와 다르다는, 너무도 기본적인 생각조차 배우지 못한 것이다. (+인간관계가 좁을 경우, 혹은 자기가 활동하는 세상의 범위가 좁을 경우, 그 한 사람, 그 한 사건만이 세상의 전부,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 되어 그 일에 미친 듯이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아무리 너구리가 별 짓을 다 해도 결국 태양이 지는 걸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다. 너구리는 ‘태양은 사기꾼’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린다. 나쁜 놈으로 낙인을 찍어버린다는 얘기다. 자신이 상대할 가치도 없는, 천하의 나쁜 놈으로 몰아가버린다. 그래야만 자신이 더 이상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해도 원하는 사랑을 받아낼 수 없으니, 차라리 나쁜 존재로 폄하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식의 심리 상태는 일상에서도 정말 많이 벌어진다. 교수님을 열렬히 흠모하며, 그분의 애제자가 되길 간절히 원하다가,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곧바로 교수님이 부패한 인간이며, 학생들을 편애하는 아주 몹쓸 인간이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면서, 교수님을 복도에서 만나도 인사도 하지 않고 개무시를 하며 지나간다. 자기 혼자서 교수님을 영웅시 했다가, 자기 혼자서 교수님을 깔아뭉개는 것이다. 교수님이 자기 맘대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이런 걸 심리 용어로 이상화와 평가절하라고 한다) 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서 열렬히 구애하다가, 그 여자가 끝내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 여자가 남자 밝히는 걸레라고, 아주 문란하기 짝이 없다는 식의 소문을 퍼뜨리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자신이 가질 수 없을 바에는 아예 망가뜨려버리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폭력적이고, 사악한 마인드이다. 이런 걸 혼자 찧고 까분다고 표현한다. 태양은 그저 자기 갈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뿐인데, 너구리 혼자 옆에서 난리를 치는, 쌩쑈를 하는 격이다.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너구리 혼자 만들어내는 지옥이라고 표현하면 좋을 것 같다.


너구리는 끝까지 태양이 자기 마음을 알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사실은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계속 거부하고, 거절하고, 무시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견딜 수 없이 화가 나는 것이다. 태양이 자기 마음을 알고 있을 거라는 근거는 자기가 태양을 바라보면서 맨날 지지 말아달라고 얘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모를 리가 없다는 거다. 하지만 그건 너구리의 생각일 뿐이고, 태양은 너구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경우, 태양과 너구리는 존재 자체가 다른 종류니까 소통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너구리가 태양에 대해 1도 모르는 것이 모든 것의 원인이다. 무지가 죄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경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끼리의 관계에서는 조금 양상이 다르다. 일단 말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전달하는데 더 좋다. 단,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말하는 방식도 다르고, 받아들이는 사고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내 방식대로 표현했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걸 내 의도대로 똑같이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할 때, 누군가는 옆에서 계속 챙겨주면 상대방이 눈치 챌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대가 감각이 둔하거나, 챙겨주는 일에 별로 큰 가치를 두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감정을 캐치하지 못할 확률이 꽤 높다. 혹은 챙겨주는 걸 아주 귀찮게 여기거나 심지어 싫어하는 독립적인 사람일 경우, 상대가 날 좋아한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여름 모기처럼 귀찮고 짜증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또 누군가는 재밌는 농담이라고, 유머스러운 매력을 발휘하겠다며 상대방을 향해 수시로 우스개 소리를 하며 호감을 표시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상대가 다큐적인 인간이라면 오히려 그 사람을 실없고 못믿을 사람으로 여기면서 멀리할 수도 있다. 또 직설적으로 사랑을 표현하겠다며 만날 때마다 사랑 고백을 쏟아낸다면, 성격이 내성적이고 말을 고르고 아껴서 하는 사람은 삼십육계 줄행랑을 칠 수도 있다.


이처럼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건 상대방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최우선적인 사항이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그가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그가 원하는 건 뭔지, 이런 것들에 대한 고려 및 배려도 없이, 무조건 내 방식대로 밀어붙이는 건 일을 그르치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내가 하는 방식이 제일 좋을 거라는 착각, 내 마음이 진실하니까 당연히 상대방이 알아줄 거라는 착각, 내가 좋아하면 상대방도 나를 좋아해야 한다는 착각, 이런 것에서만 벗어날 수 있어도 세상살이가 훠얼씬 수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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