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토끼" (유설화 / 책읽는곰)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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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설화 작가님의 그림책 ‘슈퍼 거북’을 너무 좋아하기에 ‘슈퍼 토끼’가 나왔다는 얘기에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과는 좀 다르네? 사실 뭘 기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약간 심심한 느낌이 든다. ‘슈퍼 거북’ 꾸물이의 사연이 보편적으로 더 많이 와 닿는 기분이다. 얼결에 이기게 된 경기, 대중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감, 남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무리를 하다가 점점 늙어가는 것, 그리고 경기에 지고 나서 홀가분하게 자신의 원래 삶으로 돌아오는 그 일련의 과정이 훨씬 더 잘 이해가 됐다.


하지만 ‘슈퍼 토끼’의 재빨라는 경기에 진 충격으로 ‘뛰지 말자’를 선택하고, 뛰지 않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한다. 자기 몸에서 뛰는 본능을 없애버리려고 애쓰는 것이다. 나는 이 선택이 좀 아쉽다. 차라리 무효 경기라고 주장하기 위해 열을 낸다거나, 진 것에 대한 수치심에 치를 떨며 이를 벅벅 간다거나, 밤에 몰래 슈퍼 거북 간판들을 떼어버린다거나, 이런 짓을 했더라면 재빨라의 심정이 더 이해가 됐을 것 같다. 억울하고, 분하고, 치졸한 감정들의 향연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반대로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야말로 굉장히 무의미한 짓 같이 느껴진다. 그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사람들은 재빨라가 뛰거나 말거나, 상관하지도 않을 텐데, 혼자서 이젠 뛰는 능력이 소용없어졌다고 생각해서, 꼭 뛰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조차 뛰지 않고, 많은 것을 놓치고, 잃고, 손해를 보기를 자처한다. 아, 혹시 이거 스스로 벌주는 건가? 철저하게 더욱 더 가치가 없어지려고 하는 거잖아? 남들이 말하는 한심한 재빨라가 되기 위해서 말이지. 유해진이 나왔던 어떤 광고처럼 ‘더 철저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 뭐 그런 건가?


내가 재빨라의 이런 선택이 영 탐탁지 않은 이유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재빨라에게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경기에 졌더라도, 그걸 가지고 재빨라를 쫓아다니면서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한때의 흥분이 가라앉으면 다들 자기 삶을 살기 바쁠 게 뻔하니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다 자기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오직 재빨라만 ‘달’자만 들려도 ‘달리기’로 연결시키는 신경증적 증세를 보인다. ‘달리기’에 집착하는 건, ‘패배자’에 집착하는 건 오직 재빨라 한 명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지나간 가십에 관심이 없다. 그저 토끼가 왜 저렇게 느릿느릿 걷지? 하고 의아해 하는 정도겠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재빨라가 패배자라고, 재빨라가 거북이보다 느리다고, 하루 24시간, 365일 그것만 생각하면서 지내지 않는다. 그냥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다는 사실이 이슈가 되어서 한동안 놀라워했을 뿐이다. 게다가 어떤 사람은 토끼가 중간에 잠들었기 때문에 거북이가 이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고, 그들은 거북이가 운 좋게 이긴 거라는 걸 아니까 토끼가 느리다곤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것이다. 재빨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변한 게 없다. 그들의 반응이 크게 변했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이 영원히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직 재빨라뿐이다.


나는 재빨라가 오버하고 있다고 느낀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혼자 자학하고, 혼자 벌주고, 혼자 세상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쇼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난 불행해, 난 패배자야, 난 이래도 싸, 라고 말이다. 그런 부질없는 쇼엔 공감을 해줄 수가 없다. 재빨라는 그럴 필요가 없는 존재다. 그 시합 한 번 졌다고 토끼가 안 빨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짓을 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엉뚱하게, 어리석게 고생을 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그 시간에 차라리 다른 일이라도 하지. 한심하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깨닫기 위해, 모두가 알고 있는 걸 알기 위해, 저토록 어리석은 노력으로 자신을 망치는 것이 답답하다. 그래서 공감이 안 된다.


나는 슈퍼 토끼가 좀 더 당당했으면 좋겠는데, 이 정도 사건으로 저렇게까지 바닥으로 내려갈 정도로 내면이 부실하다니 무척 실망스럽다. 재빨라는 능력이 있는 놈이다. 확실한 재능과 능력이 있는 놈이다. 그런 재능과 능력이 실수 한 번에 다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자신의 능력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소리다. 즉, 슈퍼 토끼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았다면, 경기에 지고,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어서 일시적으로 기분은 별로일 수 있겠으나,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짓은 안 했을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것이 자기 자신을 부정하려는 노력이다. 나는 그것을 슈퍼 토끼를 통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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