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이에 대해 잘 모른다. 엄마들이 이 사실만 인정할 수 있어도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저절로 풀릴지를 생각하면, 정말 안타깝기 짝이 없다. 엄마들의 가장 큰 착각은 ‘내 아이는 내가 가장 잘 안다’이다. 내 속에서 나왔고, 내가 평생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면서 키웠는데, 내가 내 아이에 대해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보이는 게 다라고 생각하는 어마어마한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혹은 어린 아이는 자기만의 생각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무지도 들어있다. 어른처럼 말하고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아이가 생각이 없는 게 아니다. 짐승처럼 그저 먹고 자고 울기만 한다고 해서,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다. 하물며 영아나 유아도 아닌 초등학생이면 오죽하랴! 그런데도 엄마들은 자기 자식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식이 해야만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어버이날 기념 과제로 할 수 없이 엄마에게 편지를 쓰게 된 이 꼬마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아이는 엄마가 친구들 앞에서 말끝마다 “알았어? 알았어?” 하면서 자기를 아기 취급하는 것에 대해 무척 수치스러워하고 있다. 엄마 입장에서는 본인이 확인하고 싶은 것만 체크하고 단속하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기 이미지를 생각하게 된 아이 입장에서는 그것이 매우 불쾌하고,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일 수 있다. 여기서 훌쩍 커버린 자식의 성장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엄마의 상태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아이가 학원 네 개를 다니느라 너무 피곤해서 학교에서는 잠만 자는 현실도 모르고 있다. 이 사실은 학교에서 선생님께 연락이 오거나, 아이가 말하지 않는 이상 엄마는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이긴 하나, 학원만 보내놓으면 알아서 다 잘 배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산인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엄마가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의 성향에 대해서도 얼마나 무지한지 알 수 있다. 방이 깨끗해야 한다고 믿는 엄마와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물건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아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대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특히 아들은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서 느낀 감흥까지 모두 물건에 담아 추억하는 다정다감하고 예민한 성격이다. 좋았던 추억들을 모두 그 순간의 현장에 있던 물건에 담아서 기억하기 때문에 물건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엄마가 회사도 빠지고 자신을 찾으러 달려왔던 날, 함께 도토리를 줍고 아이스크림 한 개를 같이 먹으며 손잡고 집으로 돌아왔던 그 날을 아이가 얼마나 애틋하게 기억하는지를 보면,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하는 순간을 가장 귀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아이가 바쁜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얼마나 속 깊게 성장했는지도 알 수 있다. 항상 바쁘고 모든 일에 열심인 엄마의 뒷모습이 아들은 가슴 아프다. 아이가 아무리 철없이 보여도 이미 엄마가 자기를 위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잘 아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학원 네 개도 군소리 없이 다니고, 자기가 학교에서 얼마나 피곤한지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하고, 자기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도, 힘든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는 그렇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삼켜버린다. 이렇게 억지로 쓰는 편지가 아닌 다음에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아픔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도 결국 착한 아들이기에 갖게 된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의 힘듬을 말하는 것이 남을 더 힘들게 만들까봐 말하지 않는 것. 그것 또한 엄마한테서 배운 게 아닐까 싶다. 힘든 게 뻔히 보이는데도 내색하지 않는 엄마 밑에서 아이가 배울 수 있는 것이란, 힘든 것은 말하면 안 되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지 않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서로를 위한답시고 서로에 대한 상처를 쌓는다. 상대방을 위해서 선택한 일인데 결국엔 상대방에게 원망을 듣고 만다.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도 아닌데, 나중엔 네가 원하는 줄 알고 그랬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소통 부재가 아니면 무엇일까? 물어보지 않고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있으며, 말하지 않고 어떻게 내 마음을 헤아려주길 바랄 수 있겠는가? 혹시 이게 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 때문에 생긴 일은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서로의 마음을 다 말하고 표현하면 이런 상황보다 나아질까? 미숙한 표현, 미숙한 말로 인해 생기는 상처가 더 크면 어떡하지? 어렵네, 어려운 문제다.
결국엔 이것도 중용밖엔 방법이 없다. 적당히 조금씩이라도 표현해야 한다. 모든 걸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다 말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이 놀라지 않게끔, 그러나 내가 답답하지도 않게끔, 때에 따라 조금씩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방에 대한 진짜 배려, 진짜 관심, 진짜 사랑이 필요하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방식으로, 적당하게 얘기하려면 얼마나 관찰을 많이 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걸 하기 위해 필요한 게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신의 결핍에 빠져 허우적댈 뿐이니, 그래서 안 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