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머나먼 곳" (모리스 샌닥 / 시공주니어)

by 마하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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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현실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주 머나먼 곳’을 가고 싶어하는 꼬마 마틴, 말, 고양이, 참새가 있다. 마틴은 누군가 자기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해 전부 다 대답해주는 그런 곳에 가고 싶어하고, 말은 말도 꿈을 꿀 수 있는 그런 곳에 가고 싶어하고, 참새는 고상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고 싶어하고, 고양이는 하루종일 노래할 수 있는 그런 곳에 가고 싶어한다. 사실 그들은 ‘아주 머나먼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저 ‘지금 여기’가 아니라는 것만 확실히 알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질문을 해도 대답해주지 않고, 노래를 부르면 욕을 먹고, 사람들은 고상하지 않고, 말은 꿈꿀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상향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곳이 분명히 어딘가엔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 곳에 갈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을 슬퍼하며 우는 것이다. (사실 이들은 다 자기 욕구가 충족이 되지 않아서, 그게 서러워서 우는 것이다)


그런데 고양이가 빈 지하실 공간을 ‘아주 머나먼 곳’이라고 하면서 그들 모두를 안내한다. 거기서 그들은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아주 머나먼 곳’을 체험한다. 참새는 고상한 사람들과 살았던 이야기를 해주고, 말은 푸른 풀밭에서 마음껏 꿈을 꾸었던 이야기를 해준다. 그럼 나머지 멤버들이 정말 열심히 들어주었다. 마틴은 궁금한 건 뭐든지 다 물어봤고, 대답할 시간이 많은 동물들은 그 대답을 진지하게 들어주고 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양이도 원 없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아주 원활하게, 마치 천국처럼 온화하게 이루어졌던 시간은 1시간 반 정도였다. 심리 상담에서도 최고의 치유는 공감하며 진심으로 들어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들이 보낸 1시간 반은 확실히 그런 효과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1시간 반 이후였다. 서로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는 인내의 한계가 온 것이다. 이들은 슬슬 또 다시 욕구가 온전히 충족되지 않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고양이의 노래는 마틴의 질문으로 방해를 받고, 고양이와 마틴의 다툼으로 말의 조용히 꿈꾸는 시간도, 예의바르고 고상한 관계를 원했던 참새의 바램도 모두 산산조각 나버린다. 결국 그들은 서로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면서 여긴 그들이 원했던 ‘아주 머나먼 곳’이 아니라면서 다 떠나간다. 그들이 원했던 것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자기 자신의 꿈이 다 이루어지고, 모두가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그런 완벽한 환경이었다. 관심도 없는 남의 꿈이며, 추억이며, 힘든 이야기 따위를 듣기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아주 머나먼 곳’은 그들의 모든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바라는 것 뭐든지 즉각적으로 다 이루어지는 그런 환상의 나라. 하지만 현실에선 그런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그런 곳에 가고 싶은 욕구를 포기하지 못하고, 어딘가에 있을 ‘아주 머나먼 곳’을 계속 찾으려 한다.


헛된 욕망과 기대. 나의 모든 욕구가 충족되기를 바라는 것. 나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누군가, 어딘가가 있을 거라는 기대. 이것이 바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비록 1시간 반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현실 속에서도 실제로 그런 것이 충족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는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들어주려고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집중해줄 때, 그것이 일시적으로 가능해진다. 그렇게만 되면 거기가 ‘아주 머나먼 곳’이고, 그들이 바라던 바로 그 천국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시간을 박살낸 것 또한 그들의 끝없는 욕망 때문이다. 남들의 이야기는 들어줄 필요 없이, 내 얘기, 내가 원하는 것만 충족되는 더 완벽한 순간을 또 바라는 것이다. 모든 시간과 기회를 독점하고 싶은 욕망, 모두가 나만 바라봐주길 바라는 욕망, 내 소원만 이루어지길 바라는 그 욕심이 결국 ‘아주 머나먼 곳’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순간마저도 파괴해 버렸다.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수많은 존재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는, 나의 모든 욕구만이 충족되기를 바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세상을 우리는 공동으로 나눠 쓰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 한 사람의 욕구만이 모두 충족되는 경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저 우리는 의식적으로 상대를 생각해주고, 배려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아기를 목욕시키느라 엄마가 너무 바쁘면, 마틴이 자신의 욕구를 조금 참아야 한다. 하지만 엄마가 아기 때문에 바쁘거나 말거나, 무조건 지금 당장 내 궁금증에 대해 답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참 이기적이고, 유아적이고,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고양이는 사람들이 무조건 자기가 노래하는 걸 좋아해주길 바라고, 말은 짐수레를 끌지 않고 마냥 풀밭에 누워서 꿈이나 꾸고 싶어하고, 참새는 왕의 접시에서 과자 부스러기나 주워 먹으면서 고상하게 살고 싶어하지만 현실은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전전해야 하는 신세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아주 머나먼 곳’을 찾아 헤매는 사람은 현실 도피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실존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환상 속으로 도망가려 한다. 지금 여기는 싫고, ‘아주 머나먼 곳’만 바라는 것이다. 그래봤자 그들은 두 배로 더 불행해진다. 왜냐하면 ‘아주 머나먼 곳’ 같은 데는 그들이 지어낸 환상, 망상일 뿐, 현실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버리지 못한 욕심 때문에 더욱 더 많이 고통 받는다.


그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구현하는 방법을 모색하기보다, 아예 처음부터 존재 조건 자체를 바꾸길 원한다. 마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다시 환생해서 재벌 3세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불가능하다. 가난이 싫으면 가난에서 벗어날 방도를 궁리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가난은 싫다고 하면서,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계속 불평불만만 늘어놓으며, 어떻게 해야 재벌 3세가 될 수 있을지를 꿈꾼다. 헛된 꿈이다. 망상이다. 바로 이 생각들이 그들의 가난을 더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든다.


내게 주어진 상황, 조건, 현실, 내 실존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될 수 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라고 백날 부정해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당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당신에게 주어진 부모이고, 형제이고, 가정환경이다. 그리고 그 이후엔 당신이 선택한 것들로 인해서 당신의 삶이 만들어지고 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부분을 고치려고 헛 꿈을 꾸고 있을 시간에, 당신의 힘과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부분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 당신의 삶을 낫게 만드는 데 훨씬 더 유익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저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당신에겐 당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갈 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아예 이것 말고 다른 삶을 달라고 찡찡거린다. 삶을 창조할 수 있는데도, 더 멋진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데도, 당신은 노력하길 싫어한다. 그저 아무런 노력 없이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한다. 그것이 바로 당신의 가장 고약한 심보다. 당신에게 주어진, 충분한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는, 무엇이든 창조할 수 있는 그 근사한 삶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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