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책을 쓱 한 번 읽고 나서, ‘아~ 이 책은 없음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있음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에 대한 책이로군!’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동물들이 자기와 뭐가 다른지, 자기에 비해 뭐가 없는지에 대해 말하고, 동물들은 아이와 달리 자신들에게 있는 것, 잘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그걸 통해 아이도 자기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한다는 내용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심플하게 생각하고, 다시 첫 장을 폈는데... 아이가 “개미는 작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개미는 작다, 근데 이 말은 팩트 아닌가? 개미는 작지, 작아서 작다고 했을 뿐인데, 그게 개미 입장에서 발끈할 일인가? 굳이 자긴 작지 않다는 증거를 들어서 반박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아이가 자기와 개미의 크기를 비교해서, 내가 개미보다 크다, 그러니까 내가 개미보다 훌륭하다, 이런 뉘앙스로 말했다면 모를까, 그냥 작아서 작다고 한 거라면 오히려 그 사실에 개미가 콤플렉스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다음 장에서 개미는 아이의 말에 반박하며, 커다란 잎을 들고 가면서 자기는 힘이 세다고 으스대고 있었다. 물론 개미의 몸 사이즈에 비해선 확실히 커다란 잎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과연 개미가 힘이 세다고 볼 수 있을까? 개미 치고는 힘이 세다? 혹은 개미 다리가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던 것보다는 더 많이 잡을 수 있다? ‘힘이 세다’의 기준이라는 것도, 디폴트 값이 얼마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괜찮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왜 나는 계속 ‘방어’로 들리지? 왜 꼭 누군가의 한 마디에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지? 왜 나에게도 대단한 면이 있다는 걸 말해줘야 하지? 개미가 작다는 건 팩트가 맞나? 이때의 기준은 아이 아닐까? 개미보다 더 작은 박테리아나 미생물, 혹은 벼룩의 입장에서 보면 개미야말로 탄탄한 몸을 가진 거의 철갑을 두른 것처럼 보이는 대단한 존재일 텐데 말이다. 개미를 작다고 보는 건, 아이의 느낌일 뿐이다. 우리 모두가 개미를 작다고 생각해도, 미시 세계에서 보는 개미는 그야말로 큰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작가의 이 의도에 반박하고 싶어진다. 왜 내가 괜찮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우린 그럴 필요가 없다. 난 나로 살기 위한 최적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독특한 특징과 특별한 능력, 그리고 이미 주어진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건 누군가에게 인정받거나 확인 도장을 받아야만 하는 게 아니다. 누가 뭐라 하거나 말거나 나는 이미 고유하고 특별하다. 아무리 작네, 크네, 왈가왈부를 해도 그건 그들의 기준에서 본 나에 불과할 뿐, 그것이 나를 정의할 순 없다. 나는 커 보일 수도 있고, 작아 보일 수도 있고, 별 볼 일 없어 보일 수도 있고, 대단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시선에 따라 출렁거리며 가치가 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나일 뿐이다.
또 누군가 나에게 없는 부분, 나에게 부족한 부분에 대해 지적을 했을 때, 내가 그렇지 않다고, 나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고, 나도 너보다 잘하는 게 있다고 꼭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그게 없으면 괜찮지 않은 건가? 개미는 작아. so what?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작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무언가를 꼭 할 수 있어야만 괜찮은 건가? 이 책 전체가 지독한 방어로 이루어져 있다. 뭔가 반드시 남보다 나은 것, 잘하는 것이 있어야만 약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그릇된 신념을 심어주는 것 같아 불편하다. 그냥 “아, 네 눈엔 내가 작아 보이는구나.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거나 말하고 넘어갈 수는 없나? 어째서 이토록 모두가 증명 강박에 시달리는 건가? 아무리 찾아도 대단할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존재는 괜찮지 않은 것인가? 물론 누구나 찾아보면 장점과 단점이 있고,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니, 찾으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하는 것과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온전하다라고 생각하는 건 큰 차이가 있다.
‘고슴도치는 가시가 많아’를 살펴보자. 이거야말로 고슴도치의 고유한 특성이다. 그 특성 자체로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 없다는 얘기다. 좀 더 중성적인 예를 들자면, 저 나뭇잎은 빨간색이야, 같은 걸 살펴보자. 이건 그냥 눈에 보이는 상태를 그대로 묘사한 것에 불과할 뿐, 빨간색이어서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것처럼 ‘고슴도치는 가시가 많아’도 똑같다. ‘털이 많아’, ‘코가 길어’, ‘목이 짧아’, ‘발이 커’, 다 그냥 그것이 가진 모양, 모습, 상태를 표현해주는 ‘묘사’일 뿐이다. 그것엔 그 어떤 가치 판단도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런데 고슴도치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반응한다. “괜찮아! 뾰족뾰족 나는 무섭지 않아.” 마치 가시에도 중요한 기능, 좋은 기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이, 사자도 감히 나를 만질 수 없다고 뻐기는 것이다. 가시가 많은 건 그 자체로 유리한 면도 있고, 가시가 많기 때문에 불리한 면도 있을 수 있다. 그것조차도 자기 자신이 무얼 원하느냐에 따라 유불리를 나누는 기준도 달라진다. 누군가와 살갑게 껴안고 싶어하는 고슴도치에게는 가시가 방해물이 돼서 싫을 것이고, 모두에게서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고 싶어하는 고슴도치에게는 가시야말로 최고의 좋은 특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도 자신의 목적에 따라 고슴도치의 가시가 편한지 불편한지를 판단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게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달라질 뿐, 고슴도치에게 가시가 많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그런 것이다.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상태에다가 호불호를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는 말이 불편하다. 괜찮다는 말은 괜찮지 않다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이다. 괜찮은 건 좋은 거고, 괜찮지 않다는 건 나쁜 것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냥 그럴 뿐인 존재의 상태에다가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괜찮지 않은지를 아이와 동물들이 서로 판단하고 납득하는 이 과정 전체가 불편하다. 게다가 막판에는 동물들이 아이에게 되묻는다. 우린 이렇게 괜찮을 수 있는 장점들이 많이 존재하는데 넌 어떠냐고? 나는 이게 싫다. 내 안에서 남들이 좋은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내서 증거로 들이밀어야만 그들이 나를 받아들이고 납득하고 안심하는 것. 그들의 걱정을 잠재울 수 있는 뭔가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걸 위해 나는 끊임없이 변명거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싫다.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 건가? 왜 계속 내가 괜찮음을 증명해야 하는 건가? 애초에 나에 대한 호불호를 지들 멋대로 가지는 것이 내 문제도 아닌데, 왜 내가 거기에 응답해야 하는 것인가?
장점과 단점을 초월하는 존재 자체의 귀함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장단점은 이분법적 사고를 더 강화시킬 뿐이다. 단점이 좀 있더라도 다른 장점이 있으면 괜찮다는 식의 사고는, 나의 온전함을 보장해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장단점의 합이 아니라,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