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음악으로 보는 사람의 가벼운 영화 추천
최근 브런치에 올라온 글들을 보니, 전반적으로 온도가 꽤 차가운 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은 조금 가볍고, 따뜻한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얼마 전 스포티파이 연말 결산을 했는데, 가장 많이 들은 앨범 중 무려 두 장이 영화 사운드트랙이더라고요. 영화 안에 담긴 사운드트랙의 맥락과 뒷이야기에서 재미와 인사이트를 얻어왔던 것 같아요.
그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친구들과 소소하게 나누곤 했는데, 저와 제 주변에만 두기엔 아까운 이야기들이 많아 이번 글의 주제를 영화 사운드트랙으로 정해봤습니다.
마침 올해, 영화 음악의 거장 한스 짐머(Hans Zimmer) 콘서트에 다녀왔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정말 추천하고 싶은 공연이에요. 일반적인 클래식 콘서트와는 달리, 모든 악기 연주자들이 하나의 거대한 퍼포먼스를 만들어내고, 각 곡마다 해당 영화의 분위기와 장면을 살리기 위한 이펙트가 더해져 압도적인 경험을 선사합니다.
생각보다 영화 음악에는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정말 많아요. 영화뿐 아니라, 음악도 함께 들어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 편 골라봤습니다.
저는 완전히 붕괴되었어요.
개인적으로 정말 사랑하는 작품입니다. 영화 N차 관람은 물론, 각본집도 따로 구매해 읽었죠. 참고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커버 매니징에 제 동료가 참여했고, 저도 소장해 놨습니다. :)
제가 이 영화에 빠진 가장 큰 이유 역시 음악입니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단순히 음악이 ‘좋은’ 영화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가 영화의 출발점이 된 작품이에요.
보통 영화에서 음악은 장면을 보조하고 감정을 극대화하는 역할을 하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 인과관계가 반대입니다. 음악을 중심으로 영화가 만들어졌어요.
영화를 처음 보고 <안개>를 들었을 때, 이런 질문이 들었습니다.
이 곡을 듣고 영화를 제작한 걸까?
영화를 제작하다 이 곡을 찾은 걸까?
아니나 다를까, 결론은 전자였습니다.
<안개>를 듣고 영화를 구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음악 애호가로서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음악이 영화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영화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요.
《헤어질 결심》 사운드트랙 앨범은 총 34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곡 한 곡 듣다 보면, 호미산 밤의 서늘한 공기가 그대로 뼈에 스며드는 느낌이 들어요. (참고로 호미산 장면은 안개 낀 이포와 구별되도록 컬러리스트가 콘트라스트와 채도에 특히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2022년 제43회 청룡영화상에서 정훈희 & 라포엠이 <안개>를 공연했을 때, 탕웨이가 눈물을 흘린 장면 역시 잊을 수 없는 순간이죠. 그 노래가 흐르는 순간, 다시 ‘서래’로 돌아간 듯한 탕웨이를 보며 음악의 힘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IlJT4LsNuk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 음악은 전반적으로 즐겨 듣는 편인데,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박쥐》의 사운드트랙도 모두 추천합니다!
대상에 대한 사랑 &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결정체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걸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습니다.
덕분에 스포츠 그 자체보다는, 스포츠가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자 비즈니스로 작동하는 방식에 매료되었습니다.
2017년, 글로벌 미디어 기업 Liberty Media가 F1을 인수하면서 포뮬러 원은 단순한 레이스를 넘어 하나의 엔터테인먼트 IP로 본격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는 그 흐름의 결정체처럼 느껴졌어요. Brad Pitt (브래드 피트)와 조셉 코신스키 감독 모두 오랜 F1 팬이었고, 그래서인지 영화 내내
“얼마나 이 스포츠가 위대하고 흥미로운지 제발 느껴봐.”
라고 외치는 듯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그 애정은 음악에서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한스 짐머가 음악감독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반은 설명이 되지만,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 <F1 The Album》은 그 이상이에요.
로제(BLACKPINK), Doja Cat, RAYE, Burna Boy, Tate McRae…
앨범 트랙리스트를 보는 순간, '이건 영화 OST라기보다 하나의 팝 프로젝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트레일러뿐 아니라 ‘뮤직비디오’의 형식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에요. 영화, 음악, 브랜드가 동시에 확장되는 구조.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결국 Apple이라는 플랫폼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Apple은 영화 제작사이자, 음악 플랫폼이자, 음악 레이블을 동시에 보유한 거의 유일한 기업이니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WWEs82u37Mw
F1이라는 스포츠가 어떻게 ‘비즈니스’로 설계되고, 그 비즈니스가 음악과 결합해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본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네요 :) 사운드트랙과 함께 그 재미를 더할 수 있기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화양연화》는 시간이 흘러도 계속 다시 호출되는 영화입니다. 리마스터링 버전이 반복해서 개봉되는 것만 봐도, 이 작품이 얼마나 오래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죠.
《화양연화》는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하지만,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그 시대를 마치 기억처럼 느끼게 합니다. 이게 늘 신기해요.
향수, 즉 노스탤지어라는 감정은 원래 직접 경험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인데, 이 영화는 경험한 적 없는 시대를 그리워하게 만듭니다.
저는 그 힘의 상당 부분이 음악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대표곡 <Yumeji’s Theme>를 듣고 있으면 선을 넘을 듯 말 듯한 감정, 말로는 끝내 표현되지 않는 관계의 긴장이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 천천히 스며듭니다. 불륜이라는 설정에서 오는 도덕적 거부감은 분명 존재했지만, 감독은 음악이 형성한 정서적 완충을 통해 그 불편함을 일정 수준에서 조절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또 하나 추천하고 싶은 곡은 <Quizás, Quizás, Quizás>입니다. ‘아마도, 어쩌면’이라는 뜻을 반복하는 이 곡은 확신을 듣고 싶지만 끝내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마치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볼레로’라는 라틴 음악 장르에 기반한 곡인데, 디지몬 애니메이션의 주제곡으로도 잘 알려진 모리스 라벨의 <Boléro> 역시 스페인 볼레로의 리듬과 정서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곡입니다.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장르, 다른 매체의 작품들이 하나의 리듬과 감정으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참 재미있게 느껴집니다. 영화를 음악으로 바라볼 때만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buqffwygUlU
《첨밀밀》의 <월량대표아적심>, 《중경삼림》의 <California dreamin'> 등등 좋은 홍콩 영화 사운드트랙이 너무 많으나, 앨범으로 제대로 묶여있는 것은 화양연화더라고요. 저도 다시 오랜만에 홍콩 영화 한 편 봐야겠습니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지
어렸을 때 《왕의 남자》를 처음 봤던 기억은, 내용의 이해라기보다 ‘충격’에 가까운 감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연산군이라는 인물, 시대극이라는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도요. 그때의 저는 이 영화가 가진 정서를 먼저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성인이 되고 다시 봤을 땐, 스토리와 영상미에 한 번 더 압도당했습니다. “영화가 이렇게 서글프게 아름다울 수 있나?”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더라고요.
그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데에는 음악이 크게 한몫을 합니다.
이병우 음악감독은 한국 영화 음악을 대표하는 이름 중 한 분이시고, 기타리스트이기도 하죠. 《장화, 홍련》, 《마더》, 《괴물》 등 굵직한 작품들의 사운드트랙을 총괄해 왔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가을 아침>이 실려 있는 양희은 앨범을 프로듀싱하거나 아이유의 <그렇게 사랑은>을 작곡하셨습니다. 기타 선율을 중심으로 감정을 ‘조용히 붙잡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곡이 <인연>인데, 여기에도 흥미로운 비하인드가 있죠. <인연>은 사실 《왕의 남자》 OST로 수록된 곡이 아니라, 감독이 노래를 듣고 가수 이선희님에게 사용해도 되겠냐고 요청해 예고편에 삽입된 곡이에요. 게다가 원래는 이선희가 드라마 《다모》를 보고 직접 만든 곡이라, 결과적으로는 사운드트랙 앨범에는 담기지 못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이 곡이 특히 흥미로운 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계속 소환된다는 점입니다. <인연>은 여러 댄스 퍼포먼스로 재해석되며 살아남았는데, 그중에서도 제가 아직까지 주기적으로 찾아보는 건 VIXX의 N이 참여한 퍼포먼스입니다. 안무가 너무 아름다워서 한 번쯤 감상 추천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fGAXrexmJk
https://www.youtube.com/watch?v=W3RcQ73GMs8
앨범 트랙은 총 30곡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각 곡의 타이틀을 보면 영화의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그려질 거예요 :)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너의 최애 영화가 뭐야?”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항상 《비긴 어게인》이라고 답합니다. 이 영화는 다른 나라보다 한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JTBC의 버스킹 예능 프로그램 《비긴어게인》도 이 영화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재미있는 연결 고리로 남아 있죠.
감독인 John Carney는 《원스》, 《싱 스트리트》를 만든 “음악 영화의 거장”으로 불릴 만한 사람이고, 《비긴 어게인》에서도 그 장점이 정말 선명합니다.
캐스팅도 그 메시지를 더 또렷하게 만들어줍니다. 실제 Maroon 5 멤버 Adam Levine(애덤 리바인)이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우리가 익숙한 목소리로 영화 속 음악을 ‘진짜’로 만들어줍니다. 여주인공은 Keira Knightley(키이라 나이틀리).
주제곡이자 타이틀곡인 <Lost Stars>가 애덤 리바인 버전과 키이라 나이틀리 버전으로 나뉘어 존재한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 매력 중 하나죠. 같은 곡인데도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애덤 버전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팝송”이라면, 키이라 버전은 가사 한 줄 한 줄을 조심스럽게 꺼내는, 발라드와 보사노바 사이 어딘가의 결로 들립니다. 마치 두 주인공의 서사처럼, Adam은 ‘현재의 나’에게 부르고, Keira는 ‘지나온 과거’에게 인사하듯이요.
이 영화가 새삼 흥미로운 지점은 음악 산업의 시스템과 구조를 꽤 현실적으로 스쳐 지나간다는 점입니다. 특히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인물이 레이블 설립자이면서 A&R (보통 아티스트 발굴부터 곡 수급, 녹음, 믹싱, 마스터링 등 제작 전반을 총괄하는 기획/제작의 핵심 역할)까지 같이 수행하는 형태로 그려지는데, 현업을 경험한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되게 흥미롭더라고요.
저는 가끔 이런 생각도 들어요. '《F1 더 무비》처럼, 뮤직 비즈니스의 전반을 더 정면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한 편쯤 나와도 정말 재밌지 않을까'하고요.
https://www.youtube.com/watch?v=cL4uhaQ58Rk
마룬 파이브 공식 계정에 들어가면 해당 영화의 일부 클립을 활용한 뮤직비디오도 있습니다. 영화 버전이랑 컷이 다르고, 오로지 애덤 리바인이 노래하는 모습만 보여주기 때문에 색다른 신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재일 음악감독님이 작업하신 《미키 17》의 <Nasha>를 추천하고 사라지겠습니다.
https://youtu.be/lhn-HRJ-1w8?si=e5wz147be85Ijx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