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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게임을 사랑하는 죄인이다

감옥에서 쓴 편지

by 션 SHON

나는 게임을 사랑하는 죄인이다. 정말 게임을 사랑한다. 만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처럼 다양한 서브 컬쳐 역시 마찬가지다. 비밀을 말하자면 난 일상에서 다양한 문화를 즐기지만, 유독 게임만은 선뜻 즐기지 못한다. 유년 시절 맞벌이하던 부모님 덕에 대부분 집에 혼자 있었다. 이런 무료한 일상을 함께 했던 친구 중 하나는 게임이었다. 처음 산 게임기 ‘컴보이’를 시작으로 학원보다 더 좋았던 오락실, 게임을 위해 부모님을 졸라서 샀던 PC까지 게임은 지루한 나의 학창 시절을 함께했다. 밤새 게임을 하는 건 기본이었다. 몇 달간 거의 집 밖에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고, 특정 게임에서 아시아 순위 10위 안에 든 적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적으로 게임과 거리 두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라 중독이 두렵기도 했고, 게임 하는 시간 자체가 ‘쓸모없다’라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난 누구보다 게임을 좋아한다. 하지만, 모순되게도 게임에 빠진 친구를 멸시하기도 했다. 공무원 준비 중인 친구가 면접 준비를 하면서 게임에 빠져들 때, 안정적인 직업 없이 종일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는 친구를 볼 때면 한심하게 생각했다. 그 모순을 느끼던 어느 날, 내가 게임을 즐기는 것을 검열하고 게임 하는 이를 혐오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게임이 비생산적이어서 행위자의 생존, 경쟁,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과, 물질적 대가를 얻거나 자기 계발을 위한 행위만이 존중받는 사회의 패러다임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며 ‘나’와 멀어지고 사회의 관념을 내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나의 게임에 대한 무의식적 거부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일론 머스크’가 게임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며, 다수의 초국적 기업의 CEO다. 그도 바쁜 일정 안에서 게임을 하는데, 나는 왜 게임을 못 하는 걸까. 적어도 ‘바쁘다’라는 핑계는 안 통할 것 같다. 얼마 전, 휴식에 관한 책에서 “하나의 행위에 대한 최상의 쉼은 다른 행위다.”라는 구절을 읽었다. 나는 그 말을 자기 탐색 워크북을 만들 때 인용했다. 그 말을 동의했지만, 실제 삶에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의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일생에서 직장에 있었던 시간이 1년도 안 된다. 그 삶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게 많지만, 무엇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동의 바깥에서 ‘반쪽의 자유’를 누렸다는 점이다. 그 자유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안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는 자유다. 자유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사실을 자유가 아닌 모순적인 상태다. 나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직업적인 일을 거부했고, 임금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유행하는 물건들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을 가고 심지어는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참아야 했다. 그럼에도 내가 반쪽의 자유를 선택한 이유는 월급날에만 자유(로운 기분)를(을) 가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의 경험은 습관이 되어, 어느덧 그것이 나의 삶이 되었다. 물론, 그 시간은 사회가 주입한 불필요한 욕망과 진정한 욕망을 구분하는 성찰의 시간이었으며,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나에게 이롭지 않은 변화도 생겼다. 나는 은연중에 욕망을 외면하고, 동시에 그 고통 때문에 내가 해야 하는 일에도 집중을 못 하게 되었다.


이처럼 게임, 여행, 친구를 만나는 것, 연애, 취미 생활, 타인을 돕는 행위 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외면하며 살아왔다. 돈을 벌게 된 후에도 그 결여된 삶의 방식은 대부분 계속되고 있다.


요즘 충족되지 않는 일상 때문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나는 에세이를 쓰는 일 외에도 ‘일의 뉴노멀’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개념을 정리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 나의 주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평일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는데, 많을 때는 2~3시간 정도 머무르고, 집중이 안 될 때는 한 시간 만에 집에 돌아오기도 한다. ‘주 업무’에 쓰는 시간이 이렇게 부족한데 ‘부수적인 업무’인 게임을 하는 시간이 너무 많아 항상 죄책감이 들었다.


나의 목적을 이루려면, 나의 사상과 철학이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통찰을 시대를 관통하며 동시에 초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나의 목적을 이루려면 현재를 유예하고 고통스럽게 이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험생 시절, 사회가 정해준 유일한 공식처럼, 고통이 나의 길에 필수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완벽함과 금욕주의가 만든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책을 쓰는 일도 4년이나 미뤘다.


나는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목적 이루기’ vs ‘나에게 스스로 부과한 책임을 회피하는 도피’. 이런 선택의 딜레마는 이번만이 아니었다.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이처럼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놓여있었다. 문제는 둘 중 어느 것도 온전한 해답이 아니며,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수능 vs 가난’


‘자소서 vs 유서’


‘가난하지만 꿈꾸는 삶 vs 진정한 나를 버리고 택하는 생존’


나는 언제나 주어진 세상에 저항했고, 그 안에 동화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순응하는 것도 거부하는 것도 둘 다 행복하지 않았다. 되풀이된 위태로운 고민 끝에 내가 좀 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것은 새로운 선택지를 만드는 것이다.


‘수능’ 혹은 ‘가난’이라는 선택지에서 ‘나의 실존’을 택했고


‘자소서’ 혹은 ‘유서’의 이분법에서 ‘가사’를 적었다.


‘꿈꾸는 삶’과 ‘생존’의 간극에서 이키가이를 찾고 나의 ‘온전한 일’을 찾았다.


이제 ‘고통스러운 목표’ 혹은 ‘무책임’이라는 선택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길’을 새롭게 만들려고 한다. 그것은 나에게 더 나은 방식인 동시에, 또 다른 나에게도 더 나은 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지금 내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나의 사랑을 부정하게 만든 이 사회가, 나의 휴식을 잠재운 세계가 나를 죄인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무죄임을 선언한다.”


나의 욕망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나의 책임도 소홀히 하지 말자. 그리고 즐기자.


나는 게임을 사랑하는 죄인이다.


이 글을 나의 탈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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