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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본질이다

취향은 있는데, 나는 없습니다

by 션 SHON

‘취향’은 처음 본 사이에도 손쉽게 꺼낼 수 있는 대화의 첫 단추다. “어떤 음악 좋아하세요?”, “요즘 자주 먹는 음식은 뭐예요?” 같은 질문들이 그렇다. 대부분에게 취향은 그저 취미나 선호의 영역에 머물지만, 나에게 취향은 단순한 ‘좋아함’을 넘어 삶의 본질 그 자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시 말해, 취향은 나의 존재와 맞닿아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취향’이라는 단어를 잠깐 들여다보자.


취향 (趣向)

[명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 또는 그런 경향


이 정의에서 중요한 건 ‘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고 싶은 마음은 본능적이고 자발적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끌리는 방향이다. 이 ‘자발성’은 취향을 특별하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취향은 여가 생활을 통해 드러나며, 여가는 노동의 여집합이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의무로 여겨지며, 괴로움을 연상시킨다. 우리는 대체로 일을 좋아해서 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다. 노동은 종종 괴로움과 의무로 연결되고, 취향은 그 반대편에 있다.

만약 먹고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들을 잠시 걷어낼 수 있다면, 그때 남는 것은 하고 싶은 마음, 즉 취향이다. 누군가의 진짜 모습은 강제된 노동이 아닌, 자발적인 선택 안에서 드러난다. 그것이 바로 본질이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취향은, 본질이다.


난 생각을 좋아한다. 아니, 사실 ‘좋아한다’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건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나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생각은 예고치 않은 손님처럼 불쑥 나를 찾아온다. 영화관에서도, 책 문장 사이에서도, 누군가와 대화 중일 때도 계속 생각이 튀어나온다. 그 생각은 말도 안 되는 공상부터 허황된 꿈, 본질적인 고민, ‘오늘 저녁은 뭘 먹지?’ 같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양하다.

이처럼 생각은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 떠오른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도 한다. 하굣길, 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을 느낀 초등학생은, ‘학교를 왜 가야 하지?’라는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다. 대학에 와서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자격증을 따는 학생들을 보며 ‘왜 우리는 꿈이 없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주변 친구들이 취준생이 되었을 때는 ‘내가 존엄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세상이 정해준 답을 따르기보다는, 나만의 질문과 나만의 답을 찾고 싶었다. 설령, 찾을 수 없는 답에 미쳐버릴 것 같아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나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특성은 ‘거리 두기’다. 끊임없이 질문하며 생각하는 나의 삶은, 자연스럽게 세상과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거리 두기란 말은 코로나 시기를 보낸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나의 거리 두기는 국가적 통제나 물리적 격리와는 다르다. 내가 말하는 거리 두기는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거리, 나와 세상 사이의 간극이다. 난 코로나가 확산되기 훨씬 전부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집단이나 무리가 가진 생활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릴 적 또래 집단 구성원들이 나보다 한 살 많다는 이유로 존댓말을 써야 했고, 깍듯하게 굴어야 하는 문화는 내게 몹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학창 시절 매일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청소 시간에 도망가던 나의 모습은 세상의 거리감을 보여준다. 나는 언제나 룰 안에 들어가기보다, 그 경계에서 맴돌았다.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


어린 시절엔 그저 적응하거나 일탈하거나, 이분법적 프레임 안에 갇혀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선택하지 한 채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땐 내가 다른 방식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재정의하기’ 역시 나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취향’이라는 단어를 재창조한 것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쓰는 수많은 개념의 의미를 고찰하고 새롭게 정의하는 일이 내겐 익숙하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현 인류와는 다른 하나의 종(種)으로 지칭한다. 그 이름은 바로 ‘일을 다시 정의하는 사람’. 나는 사회가 강요하는 일의 관념을 받아들이지 않고, 노동을 거부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어떤 운명적인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었고, 마침내 ‘일’의 의미를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정의했다. 그것이 내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이유이다.

이 외에도 나는 ‘태어남’, ‘이름’, ‘나이’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해 왔고, 지금은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있다. 나는 기존 관념의 틀이 가진 한계를 뚜렷이 느껴왔고, 그게 바로 나만의 취향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또 하나의 나의 그림자는 ‘기획하기’다. 나는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정의할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내놓을지 고민한다.

처음에는 음악으로 시작했다. 그다음은 공연과 문화 기획, 그리고 뮤직비디오와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 매체로 확장되었고, 지금은 단체 활동이라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일의 뉴 노멀’과 ‘새로운 인류’에 대한 이야기를 에세이와 연구물의 형태로 준비 중이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여러 분야, 장르, 방식을 넘나들고 있지만 연결되어 있고, 결국 이 세상 위에 나의 존재를 새기는 일이다.


나의 취향이자 본질을 들여다보면, 주로 정신적인 것들이 떠올랐다. 그만큼 나는 정신적인 영역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결국 나의 취향은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고, 익숙한 것들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고,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창조하는 일이다.


나의 본질은 나의 특성이자 취향이며, 또한 나의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거리를 두고 나만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은, 처음에는 의미도, 이유도 알 수 없는 혼돈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이 싫기도 했다. 이제는 삶의 굴곡과 지금의 내 모습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런데도 근원적인 외로움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다. 외로움과 고독 사이에서 삶을 이어 나갈 때, 난 그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의 취향을, 나의 본질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언제나 내 모습 그대로를 나를 이해해 주는 누군가를 기다려왔다 - 내 취향을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을 때부터. 본질이 빠진 취향만이 가득한 관계에서는,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취향을 가득 담아 초대장을 보낸다.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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