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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원죄 02

우리가 약관도 거부권도 없는 인생을 맞이하는 이유

by 션 SHON

누가 감히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가? 인간에게 그런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한 이는 누구인가? ‘생명의 창조’란 오직 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부모는 신을 숭배하면서 동시에 신의 권능을 대리했다. 부모는 자녀에게 신이다.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무엇을 할지, 심지어 무엇을 생각할지까지 통제한다.

자신의 철학, 가치관, 노동관, 종교관을, 나아가 사회 주류의 생각까지 주입한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지를 규정하고 강요한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리고 비난하고 가스라이팅한다.


한낱 인터넷 사이트조차 회원 가입 시 ‘동의’를 구한다. 그러나 태어남은 삶이라는 가장 중대한 과제를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일이다. 그 선택 하나로, 우리는 평생에 걸친 고통과 기쁨, 사랑과 상실, 생존과 경쟁, 의무, 불합리함, 교육과 노동의 강제, 관계 등 삶의 모든 요소들과 필연적으로 얽히게 된다.

하지만 이 결정은 단 한 번도 당사자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

삶이라는 거대한 계약에는 어떠한 약관도, 거부권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동의 없이 삶을 강제하는 행위는 폭력이나 범죄로 간주되지 않는가?

아니, 좀 더 본질적으로 묻자. ‘존재의 비동의’는 왜 인류에게 숨겨져 왔는가?

나의 추론에 의하면,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1. 문명의 지속을 위해서

국가, 법, 제도, 교육, 노동, 가족 등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근간은, 누군가의 ‘태어남’, 즉 존재 그 자체를 전제로 작동한다. 누군가 존재하지 않는 다면 기본 사회 단위인 가족을 이룰 수도, 노동을 하거나 세금을 낼 수도 없다.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 문명을 대물림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존재가 있기에 국가는 개인을 집단의 목적에 맞게 교육시키고, 제도화하며, 법으로 통제할 수 있다. 만약 ‘존재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사회 전체의 구조를 위태롭게 한다. 국가가 자살을 막는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2. 유전자의 명령

진화론에 의하면, 유전자의 최우선 목표는 자신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출생은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본(자손)’을 만들고 세상에 내보내는 과정이며, 유전자의 생존 전략이다. 출생은 또한 개체가 부모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는 유전자가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시도하는 하나의 ‘실험’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유전자 조합을 가진 개체들이 세상에 태어나며, 이런 유전적 다양성은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요인이 된다.


3. 부모의 사랑이라는 관념과 충돌한다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사랑해서 너를 낳았다.”, “인생은 아름답다.”, “너는 우리에게 온 가장 큰 선물이야.”

태어남은 사랑의 결과라고 믿는다. 그러나 존재의 강제성을 자각하는 순간, 그 사랑은 타인의 고통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이기적인 감정이 될 수 있다.


태어남은 부모의 사랑의 성역이다. 그 성역을 침범하는 생각은 금기시된다. 그 사랑을 정당화하기 위해, 삶이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은 허용되지 않는다. 태어남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묻는 일은 아예 생각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부모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탈룰라’라는 말이 만들어진 이유도 그 때문이다. 자녀는 성인이 될 때까지—혹은 그 이후로도—부모의 보호 없이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기 매우 어렵다.

경제적으로 부모의 자원 없이 독립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부모는 자녀의 절대적인 선배다. 사회에서 배워야 할 거의 모든 것의 기초를 부모에게서 배우며, 그 안에서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옳은 것으로 인식된다. 만약 그 사랑을 의심하는 자녀가 있다면, 부모의 정서적 지지를 잃게 된다. 부모와의 유대가 파괴될 각오를 해야 한다.


4. 종교적 질서

종교는 사회의 가치관과 도덕 기준을 형성하며, 공동체의 사상적 기반을 이룬다. 따라서 종교에서 규정하는 ‘삶의 의미’는 종교인을 넘어 비종교인의 삶의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세계 1, 2위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전 세계 인구의 약 54%를 차지하며, 공통적으로 인간의 탄생을 ‘신의 뜻’으로 해석한다. 또한, 힌두교(약 15%)와 불교(5%) 역시 태어남과 삶을 ‘카르마의 결과’로 해석하고, 이를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수행의 과정으로 본다.

이러한 종교적 세계관 속에서 태어남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종교적 질서에 대한 의심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공동체 내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생각이며, 자기 검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일부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법에 의해 처벌받거나 폭력적 보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5. 사회적 성공의 제약

의문을 갖는 태도는 비판적인 사고와 지성의 성장을 담보하지만, 사회적 성공과는 대체로 충돌한다. 현실에서 환영받는 것은 사유의 깊이보다 ‘좋은 학벌’과 ‘고스펙’을 갖춘 사람들이다. 이는 곧, 사회가 불합리한 시스템에 문제 제기하는 이보다, 체제에 조용히 순응하는 이가 환영받는 구조를 보여준다.

결국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란, 철학적 깊이나 존재의 물음이 아니라 시장에 즉시 투입 가능한 효율적 자원이다. 질문하는 인간보다, ‘지시를 따르는 인간’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태어남’에 대한 의문은 사회가 요구하는 생애 주기-학업, 취업, 결혼, 재생산-를 거부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 체제나 구조에 대한 저항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 의문이 삶의 기반 전체를 흔들 정도로 깊어질 경우, 사회적 활동을 거부하거나 자살로 이어질 위험도 있다.

특히 한국처럼 의무감, 성취, 효율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존재에 대한 실존적 질문은 게으름, 비생산성, 이상주의로 간주되고 질문 자체를 비정상적이라 규정된다.

결국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질문은 개인의 존재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사회적 성공의 길에서 이탈하게 한다. 이는 기존 사회 철학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위한 대안적 사유 체계나 삶의 모델이 부재하다는 사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진 이들은 끝까지 걸어볼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되며, 진정한 멘토나 인생의 선배조차 만나기도 어렵다.


6. 사랑과 가정의 이상화

사랑과 가정은 인류에게 가장 소중하고 본능적인 가치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만큼 획일화되고 이상화된 가치도 드물다. 사랑은 매번 이성애적·배타적 관계로 전제되며, 그 결실은 결혼과 출산이라는 ‘정상적인 삶’의 과정으로 규정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사랑의 방식이나 관계의 형태를 선택할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사랑한다면 결혼해야 하고, 결혼했다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에 순응할 것을 요구받는다.

특히 집단주의가 강하고, 정상성에 대한 집착이 높은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규범이 더욱 강하게 작동한다.


이처럼 문명의 지속, 유전적 본능, 종교적 질서, 부모의 사랑, 사회적 성공, 가정의 이상화 등으로 구성된 강력한 구조 안에서, 다음과 같은 실존적 질문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

"아이를 낳는 것은 이기적인 선택 아닐까?”

"아이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다면 과연 행복할까?”


이런 의문은 이기적이거나 미성숙한 것으로 취급되며 은폐된다. 출산, 양육, 교육이라는 인생의 가장 고통스럽고 중대한 결정들조차 ‘사랑이라면 감내해야 하는 것’, ‘그게 삶의 의미’라는 식의 낭만화된 언어로 포장된다. 그리하여 개인이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성찰은 점점 더 사라지고, 오히려 비동의하는 자가 결핍되고 병든 존재로 낙인찍히는 문화가 형성된다.


‘존재의 비동의’가 언어화되지 못하고 은폐되는 요인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인식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이 의문 자체가 가진 철학적·논리적 한계에 있다.


‘존재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성립시키려면, 먼저 출생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묻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선형적 시간 구조 속에서 살아가며, 출생 이전에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시점에서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설령 자아가 존재한다고 해도, 어떤 삶이 살 만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충분히 삶을 경험한 이후에야 의미를 갖는다.

물론 삶이 살만한 쪽에 가깝더라도, 그 안에 수많은 부조리와 고통, 불합리한 제도와 문화는 분명 개선의 여지를 남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그 과정 속에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요컨대, 존재의 비동의는 자아의 부재, 시간 구조의 제약, 인식의 불완전성이라는 복합적인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 결과, 누구도 자신이 태어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류는 동의할 수 없는 삶의 재 생산을 멈추고,


스스로 종말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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