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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원죄 03

노동자, 예술가, 시민으로서의 부모

by 션 SHON

요컨대, 존재의 비동의는 자아의 부재, 시간 구조의 제약, 인식의 불완전성이라는 복합적인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그 결과, 누구도 자신이 태어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인류는 동의할 수 없는 삶의 재 생산을 멈추고,


스스로 종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면 된다.”


현실을 말처럼 쉽지 않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회의 규칙, 법, 윤리, 문화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의 사안에 대해 수많은 의견이 대립하고 있으며, 그런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본질이자 다원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결핍을 겪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각자의 불행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 그 다양함 속에서 공통된 ‘삶의 최소 기준’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물론 이 작업은 결코 쉽지 않다. 모든 이의 고통을 균등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려운 일을 지금, 우리 스스로가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할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삶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의 증언이 필요하다. 무엇이 그들을 삶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일과 학교, 가정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들었는가?


자살한 사람.

삶이 잠정적 자살의 중지 상태인 사람.

우울한 사람.

학교를 거부한 사람.

일하지 않는 사람.

비적응자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자.


인류가 ‘존재의 비동의’를 인지하지 않는 것은, 결국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는 일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 결과, 기존 사회 체계의 불합리함을 유산처럼 물려받고, 자녀에게, 타인에게 그대로 강요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되려면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직업이 있는 사람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다. 때때로 노동의 의무를 저버린 부모가 자녀를 방치하는 이야기가 리얼리즘 영화의 소재가 되곤 한다. 이는 사회가 부모에게 자녀를 경제적으로 부양할 책임이 있다는 일종의 암묵적 합의를 의미한다.


하지만 부모의 자격을 규정하는 합의점은 대부분 여기에서 멈춘다. 부모의 자격은 자녀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노동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한정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부모는 예술가여야 한다.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라는 뜻이 아니다. 섬세한 감각을 지닌 존재여야 한다는 말이다. 자녀가 사회화 과정에서 겪는 혼란을 감지하고 그에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많은 부모는 자신이 사회에 순응하는 과정에서 감수성을 버렸고, 그 결과 ‘중2병’이라는 단어는 발명되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부모는 자녀의 혼란과 거부, 비적응을 언제나 ‘일탈’이나 ‘치기’로 취급한다


이 잘못된 인식을 바꾸면, 그다음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진다.


부모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시민은 정치적 주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란 곧 ‘투표’이기에, 시민은 곧 투표하는 사람이다. 그런 협소한 해석만으로는, 아이가 살아갈 만한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시민은 자녀가 살아갈 가정과 사회, 일터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다. 물론, 부모는 모든 문제를 감지할 수 없고, 자녀와 견해가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더더욱, 부모는 자녀에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달라’는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부모는 자신이 정답이라 믿는 세계를 강요하지 말고,

자녀에게 세상을 구성할 권리, 즉 ‘구성권’을 주어야 한다.


가출한 아이,

탈학교 청소년,

노동을 거부한 사람,

집밖으로 나갈 수 없는 사람.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무책임하고 나약하다?

게으르다?

의지가 없다?

반항적이다?

피해의식이 많다?

그래서 정상이 되도록 계도해야 하는 대상들일까?


틀렸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그들 스스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칙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는 밥상에 오른 반찬조차 결정할 수 없고, 청소년은 무엇을 배우고, 어떤 기준으로 평가받을지 결정할 수 없다. 노동자는 얼마나 일할지 결정하거나 무엇이 노동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정할 수 없다.


현 민주주의는 자격을 요구한다. 나이, 선출, 시험 통과, 같은 자격을 충족해야만 구성원이 된다.

이런 엘리트주의가 만든 사회의 결과는 우수하지 않다. 편견을 버리고, 다르게 생각해 보자.

존재 자체가 곧 권한이다. 사회 구성의 권리는, 존재 그 자체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을 나는 ‘존재 기반 구성권(Existence-based Constituent Right)’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 시스템을 어떻게 세상에 가져올 수 있을까?


그 변화의 ‘일’의 재정의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윤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활동을 통해 자기 실현하고, 공공의 가치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새롭게 정의된 일을 통해 새로운 합의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구성권이 태어난다.

그때가 되어야,


인류는 마침내 자녀를 낳을 자격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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