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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콤펄서스 : 일해야만 하는 사람

우리가 전쟁을 방관하거나, 무의미한 일을 하는 이유

by 션 SHON


인류는 정말 지혜로운가?


‘호모 사피엔스’는 현생 인류를 일컫는다. 약 30만 년 전 아프리카 대륙에서 등장한 이들은, 이후 전 세계로 이주했다. 이들은 종종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 등의 아종과 비교되는데 주로 언어 능력, 예술 활동, 생존 전략이 더 뛰어나며, 특히 상징적 사고와 집단 협력이 강점이라 꼽힌다. 역사가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었듯, 인류는 그런 자신에게 ‘지혜로운 인간(Homo sapiens)’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최근 ‘자기 객관화’라는 말이 유행이다. 원래 이 표현은 ‘자신을 타인의 시선이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행위’를 뜻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본래의 성찰적 의미에서 멀어져, 체념을 강요하는 현실 순응의 언어로 퇴색되었다고 느낀다. “네 주제를 파악해라, 현실을 직시해라.”라는 식으로, 자기 성찰은 자기 체념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정말 그 의미대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면, 인류의 호명은 선 넘은 ‘올려치기’다.

기록된 3421년의 역사 가운데, 전쟁이 없었던 해는 단 268년으로, 이는 전체의 약 7.8%의 불과하다. 1945년부터 1990년까지의 2,340주 중,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단 3주뿐이었다. 제1, 2차 세계 대전에서는 약 1억 명이 사망했다. 중세의 마녀사냥, 노예제도, 나치와 스탈린의 학살, 문화 대혁명처럼 대규모의 참사는 반복되었다.


물론 이 비극들은 대체로 수십 년, 혹은 수 세기 전의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은 더 나아졌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2022년에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중동에서는 시리아와 예멘 내전이, 아프리카에서는 에티오피아-티그라이 분쟁과 수단 내전이 진행 중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스라엘-이란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와 파괴가 계속되고 있다. 전쟁과 재난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은 현재 1억 1천만 명을 넘었고, 이는 전 인류 13명 중 1명꼴이다. 물론 지금도 그 수는 계속 늘고 있다.


농업혁명을 시작으로 1·2차 산업혁명, 정보혁명, 그리고 AI의 발달에 이르기까지, 기술의 비약적인 성장은 인류의 진보를 보여준다. 인류는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날 만큼 많은 식량과 자원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기술과 생산성의 성장은 인류 지성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은행 기준, 하루 2.15달러(약 3천 원) 미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극빈 인구’라 한다. 2024년 기준, 약 6억 9,200만 명, 전 세계 인구의 약 9%가 극빈층이다. 전 세계 27%의 인구는 적절한 하수도 시설 없이 살아가고 있으며, 이는 수인성 질병의 확산과 삶의 질 저하로 이어진다. 반면, 세계의 부는 극소수가 독점하고 있다. 상위 1%가 전 세계 재산의 약 절반을, 상위 0.1%가 20%를 소유하고 있다. 미국의 상위 0.1%의 부는 1980년대에 7%에서 2020년대 약 18~20%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가면, 현지의 무척 저렴한 물가에 놀란다. ‘만 원으로 살 게 없다.’라는 말이 나온 지도 어느덧 십수 년이 넘었다. 그런데, 물가가 싼 국가를 가보면 그 만 원으로 하루 세끼와 디저트까지도 먹을 수 있다. 현지에서는 적은 비용으로도 좋은 서비스와 질 좋은 호텔, 음식을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해당 국가의 평균 월급이 40만 원이 채 안 되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서 그런 혜택을 누리면서도, 이게 정당한 것인가 의문이 든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이 그곳 사람들에겐 얼마나 특권적 일지, 그들의 노동의 대가가 제대로 배분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반면, 나는 미국이나 북유럽 같은 고소득 국가에 가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물가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이들 국가는 높은 물가만큼 높은 급여를 제공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만큼 임금을 받는 나라니 문제없다"라고. 혹은 “국가의 생산성과 개인의 능력에 따라 대가가 결정된 것”이라고.


얼마 전에 필리핀에서 만난 친구는 한국을 매우 좋아했지만, 비자 발급이 안 돼서 한 번도 방문하지 못했다고 했다. 경제 상황과 상관없이, 국적에 따라 이동의 자유조차 제한된다. 극빈국에서 태어난 이들이 선진국의 물가를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아예 그 땅을 밟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똑같은 직종에 종사해도, 태어난 국가에 따라 임금과 삶의 질은 하늘과 땅 차이다. 계급, 인종, 외모뿐 아니라 국적 역시 삶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우리의 경제적 번영이 곧 다른 이들의 빈곤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과연 우리는 ‘지혜로운 인간’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보자. 한국은 전쟁 이후 아무것도 없던 폐허에서 단 몇십 년 만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기적의 나라다. ‘한류’와 K-POP로 대표되는 문화적 파급력도 세계적이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2023년 기준 출산율은 0.72명, 사실상 국가의 존속조차 위태롭다는 신호다. 이것들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절망에 물들어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한국은 인류의 부정적인 행태를 가장 압축적으로, 그리고 기형적으로 보여주는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성장 신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과거의 논리를 살아간다.

전쟁 이후 아무것도 없던 시대에 '하면 된다'라는 구호는 필요했다.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봐야 했고, 경쟁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자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기술도, 가치관도, 세계의 흐름도 바뀌었는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모두에게 같은 표준을 강요하며, '정답'이라는 허상을 밀어붙인다.


모든 것이 효율화되고 계산되며, 인간은 점점 더 기계처럼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감정까지도 ‘정상’의 틀로 재단된다. 우울, 무기력, 고독은 개인의 문제로 취급되고, 병리화된다. 그러나 그건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구조적 결과물이다. 자살률 1위, 출산율 꼴찌, 늘어가는 청년의 니트와 은둔, 일하는 사람의 우울증과 번 아웃. 이것은 통계가 아니라, 인류가 받은 시험 성적표이다.


이렇듯 인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를 죽이며, 착취한다. 국경의 담벼락을 더 높이 쌓는다. 다른 국가와 민족을 혹은 타인의 고통을 방관한다. 국가 간, 지역 간, 계급 간 불평등은 가속화되며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평생 남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며 죽어간다.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한 채로.

그런데도 인류는 지혜로운가?


나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인류에게 ‘지혜로운 사람’은 어울리지 않는 이름표다. 난 인류에게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그들의 ‘진짜 이름’, 즉 본명을.” 본명은 사전적 정의로 ‘본디 이름’이며, 즉 진짜 이름이란 뜻이다. 그래서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봤고, 인류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은 바로, Homo compulsus(호모 콤펄서스), 여기서 'compulsus'는 'compellere' (억지로 시키다, 몰아붙이다)의 과거 분사이며 자발적이라기보단 “해야만 해서”, 혹은 “시스템에 의해 밀려서” 강제되었음을 뜻한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류는 ‘일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지금 인류는 역사상 최고의 생산성을 지녔음에도, 하루 평균 4~6시간 일했다고 전해지는 원시 인류보다 훨씬 오래 일한다. 또한, 노동 시간 외에도 자기 계발, 브랜딩의 시간까지 포함하면 일과 여가의 경계조차 사라질 정도다. 최소 12년을 교육받아야 최소한의 사회인으로서의 인권이 주어지고, 점점 그 기준은 높아진다. 우리가 강제로 학교에서 10시간에 가까이 몸을 의자 위에 결박하는 이유는, 회사에서 오래 일할 수 있는 신체로 길들여지기 위해서다. 우리의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며 여유로움을 빼앗아 간다. 그 불안함은 우울이 되고, 강박이 되며, 결국엔 번아웃으로 되돌아온다.


우리가 모든 생애를 쏟아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자신의 자아를 실현해 주는 것인가?

사회와 시민들의 더 나은 삶을 만들어 주는 것인가?

아니다. 오직 그 목적은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은 자아실현과 사회적 가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두 가지를 훼손하기도 한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일과 삶이 분리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일 안에 결핍은 당연한 것이 되었고, 일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포기된다.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무언가에’에게 양도한다.


우리 앞에 있는 거대한 문제, 혹은 일상적인 문제들조차 ‘일해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인류의 본성 때문에 끝없이 재생산되며,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인류의 평화와 양극화 문제와 같은 중대한 일을 위해 힘쓰도록 허락받지 못한다. 또, 자신이 누구이고 어떤 삶의 목적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성찰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방식으로 사회의 자원을 배분해야 할지, 사회에 필요한 일은 무엇인지 공론화하는 것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이웃과 동물, 자연을 사랑하고, 지구를 지키는 일에 힘 쏟는 시간을 환대하지 않는다.


오직 시험 범위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 시험 범위는 학교 성적, 수능, 스펙, 연봉, 성과, 사회적 기준이다. 시험 출제자는 돈이다. 그 법칙, ‘일해야만 하는 인간’의 본성을 거부한 순간, 우리는 ‘인류의 난민’이 된다. 인류의 난민인 나는 인류로부터 거부당했고, 나 또한 인류를 거부했다. 그래서 나는 인류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려 한다. 내가 그 새로운 인류로 살아감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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