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이세요?” 묻기 전에 생각할 것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먼저 이름을 나눈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대부분 ‘나이’다.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나는 나이가 없기 때문이다.
“저는 나이가 없습니다.”
혹자는 농담인 줄 알고 웃는다. 혹자는 나의 대답을 듣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되묻는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우리 삶에서 종종 ‘어떻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라는 질문이다.‘ 그에 답하기에 앞서, 먼저 생각해 보자 “나이란 무엇인가?”
나이
[명사] 사람이나 동ㆍ식물 따위가 세상에 나서 살아온 햇수
나이는 특정 존재가 출생으로부터 경과한 시간을 의미하며, 태양력을 기준으로 12개월, 약 365.24일마다 개인에게 ‘1세’라는 수치가 부여된다.
어떤 개념의 사전적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맥락에서 통용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나이에 대한 정의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이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맥락에 대해서 반문하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크게 두 가지의 거대한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 연령에 따른 생애 주기적 역할 규범화.
두 번째, 나이의 높낮이에 따라 결정되는 위계 체계.
첫 번째 ‘역할 규범화’에 대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 유치원생, 초등학생, 아들, 딸, 부모, 회사 대표, 마케팅 팀원, 교회 집사 등 삶에서 개인이 맡는 역할은 굉장히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이를 단순화해 보면, 10대에는 공부하고 20대에는 취업하고 30대에는 결혼하고 40대에는 자녀를 잘 교육시켜야 하며 5-60대에는 자녀를 결혼시키고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처럼 나이에 따른 역할과 정해진 진로는 우리에게 목표 의식을 주며, 때로는 안정감을 느끼게도 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정해진 진로에 답답함을 느끼며 그 경로를 벗어난다. 의무교육이나 대학교를 그만두거나, 퇴사하는 청년은 점차 늘어나고 있다. 비혼과 비출산의 흐름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획일적인 이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은 쉽게 불안에 휩싸이며, 사회적 낙인을 감당해야 한다. 이를테면, 청소년을 지칭하는 ‘학생’이라는 말에는 이미 ‘탈학교의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학교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은 곧잘 낙오자로 취급된다. ‘청년 니트(NEET)’가 극심한 사회적 문제로 다뤄지는 것도, 20대라면 직업을 갖고 일을 해야 한다는 통념 때문이다. 직업의 범주 밖에 있는 이들은 무기력하고 게으른 존재로 대상화된다. 또한, 결혼 적령기가 되었는데도 결혼하지 않은 청년들을 마치 문제 있는 사람처럼 취조당하기도 한다.
“너 왜 결혼 안 했어?”
이런 사회적 배경의 연장선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나이가 만든 저울 위로 올려놓는다. 삶을 스스로 살아가기보다, '그 나이에 걸맞은' 모습인지 아닌지를 따져보게 되는 것이다.
“제가 올해 25살인데, 지금 대학 가는 게 너무 늦지 않을까요?”
“이제 30살인데 아직 모은 돈이 없어요. 제 나이에는 얼마쯤 모아야 하나요?”
이처럼 나이가 강력히 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사회에서는, 그 나이에 따른 역할을 정교히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차별과 배제가 가해진다. 나아가 스스로에게 강력한 자기 검열이 작동한다.
두 번째 나이의 위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내가 처음 나이가 가진 부당함을 인식한 것은 유치원 시절, 대략 6-7살 무렵이었다. 동네 형 A를 따라 옆 동네 무리에 간 적이 있었다. 무리와 인사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그 뒤에 옆 동네 형들은 은연중에 내게 존댓말과 ‘형 대접’을 강요했다. 그때도 지금도 나이가 어린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조아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룰이다. 그날 처음으로 ‘사늘한 위계’를 느꼈다.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 사이에서 몇 시간 동안 말없이 서있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집단이든, 어떤 사회든 그곳의 핵심 규칙이나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그곳에 낄 수 없다. 심지어 이상한 사람 취급까지 받는다. 특히 ‘동방 예의지국’이라 불리는 한국에서 나이가 만들어내는 위계는 기독교의 ‘십계명‘ 이상의 권위를 가진다. 아니 어쩌면 ‘신앙’과 더 가까울 수도 있다.
다시 나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런 유사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조금 더 내향적인 사람이 되었고, 여러 집단에서 늘 겉돌았다. 나를 사회와 거리 두게 한 것은 단순히 나이와 관련된 사건만이 아니라, 한국 문화, 나아가 인류 문화 전반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결국 남들처럼 이 세상의 법칙에 길들여져 갔다. 형과 누나에게 존댓말을 하는 게 당연했고, 동생에게는 '내가 다른 연장자들에게 준 만큼’ 대접을 돌려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에서는 잘 안 됐다. 권위주의적인 형들하고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게 되지도 않았다. 거부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였다.
그러다 몇 가지 계기를 통해 나는 결국 이 세상의 ‘당연한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는 그 이유를 더 깊이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이가 없는 이유, 정확히는 나이가 가진 억압으로부터 탈주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이로 나와 타인의 존재와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그 나이를 곧 나 자신을 규정하는 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 결과, 자신을 고유한 정체성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연령에 따른 역할로 감각하며 살아가게 되고, 삶은 점점 규격화된다.
이처럼 나이는 개인에게 생애 주기적 삶을 강요하고, 개인의 다양한 가능성과 자유를 제한한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를 사회라는 표준화된 조립 라인에 올려놓아 똑같은 기능적인 제품으로 만들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불량품처럼 버려진다.
나이가 만든 우스꽝스러운 위계질서의 세계에 편입되지 않고, 말뿐이 아닌 진정한 평등을 일상에서 만들기 위해서다.
문화란 한 사회의 주요한 행동 양식이나 상징체계를 말한다. 우리는 사회화 과정을 통해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그 과정에서 그 사회의 문화를 내면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만든, 아니 정확히는 ‘이미 죽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를 수용하면서 한 가지 본질을 잊는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그 사실은 우리가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나이주의 문화’가 가지는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이다. 또한, 법치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헌법은 모든 법과 제도, 정치 체계 위에 존재하는 최고 규범이자 최상위 법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조항은 이어지는 내용처럼 모든 국민은 실제로 평등하며,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이 문장은 현실에서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개선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는 지향점이자 인류의 숙원으로서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나이에 따라 호칭과 대우가 달라지는 명백한 차별을 용인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문화는 인류의 숙원이자 헌법이 지향하는 가치와 배치되며, 많은 한국인들은 그 모순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나이 중심의 위계 문화에 중독되어 있다.
나이라는 기준선에 구속되지 않고 살게 된 후, 나는 자유를 얻었고 좀 더 평등하게 세계와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주저함 없이 내가 원하는 것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직업을 넘어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다양한 취미 활동을 즐긴다. 가고 싶은 나라를 여행하며 다른 문화를 감각한다. 글을 쓰고, 다양한 예술 작품을 만들며, 그것을 여러 방식으로 사회와 연결한다.
압존법과 비대칭 언어가 만들어내는 뒤틀린 위계와 과도한 형식주의의 불편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빠른 생일이나 개족보 같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개념에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가 몇 살 같이 보여요?”같은 ‘늙은 질문’을 하며 일희일비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며, 국가와 사회의 병든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신념을 지키고자 한 대가로 많은 것을 잃기도 했다.
일반적인 집단에 무난히 동화되기 어렵다. 신념을 지키다가 조리 돌림을 당하고 욕을 먹은 적도 있다. 오디션에 합격한 공연장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동의 없이 말을 놓을 때, 나도 똑같이 대칭 언어를 쓰면 모자란 사람 취급을 받는다. 관계 속에서 나이에 얽힌 쓸모없는 이야기가 공해처럼 떠돌아다닐 때마다 소중한 시간을 잠식당한다. 나이의 위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음 편히 속할 집단을 찾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잃었으니, 어찌 보면 공평한 등가교환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형식적인 균형은 뒤틀려 있기에, 난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나의 상실은 인류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이에 대한 나의 철학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것은 몹시 번거롭고 지치는 일이다. 지금 시대 한국에서 살아가다 보면 나이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개념들에 대해서도 설명 아닌 해명을 해야 한다. 매번 타당함과 설득력을 증명하라는 요구는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무지의 폭력’이다. 주지하다시피 소수자 문제는 사실 다수자 문제이다.
사회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작 자신의 소신을 지키지 못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문화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이들의 철학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상식이라 불리는 폭력을 넘어서, 진정한 상식이 무엇인지 고찰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결국엔 자신을 위해서. 그것은 학력과 스펙, 연봉으로 환원할 수 없는 인류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지성이다.
이제는 인류가 스스로 시험 범위 밖에서 사유하는 방법을,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하는 감각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여러 지표를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또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이야기하고 합의점을 찾고, 그렇게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 인류가 나아갈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