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이름, 빼앗긴 자신
안녕하세요. 전 —입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안녕하세요. 전 시원한 형입니다.
네??
제 이름은 시. 원. 한. 형.입니다.
네???
사람들을 만날 때. 전화를 걸 때. 내 이름을 말해야 할 때. 늘 벌어지는 일이다.
내가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듣지 않는다.
이런 경험에는 이골이 났다.
처음부터 분명하게 말한다. 그래도 안 되면 발음을 천천히,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줘서 뱉는다.
그래도
듣지 않는다.
이 사건은 나의 발성이나 발음 때문이 아니다.
청자의 귀 때문도, 주변 소음 때문도 아니다.
범인은 바로 듣는 이의 고막을 두껍게 덮은 편견이다.
한국인의 이름은 성 한 글자와 이름 두 글자로 이루어진, 일명 ‘홍길동’식 이름이다.
가끔 두 자나 네 자의 이름도 있긴 하지만,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그래서 듣는 사람의 모든 신경은 한국 이름의 ‘스트라이크 존’을 향한다. 그 규격 밖에 소리는 들어도 듣지 못한다. 아니, 듣지 않는다.
본명과 가명, 사람들이 흔히 이름을 나누는 방식이다.
본명 (本名)
가명이나 별명이 아닌 본디 이름.
가명 (假名) 1. 실제의 자기 이름이 아닌 이름. 2. 임시로 지어 부르는 이름.
사전적 정의 대로라면 본명은 가명이나 별명과 구분되는 ‘진짜 이름’을 뜻한다. 사람들은 흔히 법적인 이름인 ‘실명’을 본명이라 부른다. 이처럼 실명과 본명은 같은 뜻으로 통용되다.
그렇다면 그 이름을 정말 ‘진짜 이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본명을 자신의 진짜 이름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그 이름을 자신이 직접 지었는가?"
"그 이름을 좋아하고 자랑스러워하는가?"
"그 이름이 자신의 고유성을 나타내고 있는가?"
"그 이름은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 이름을 자신의 진짜 이름, 즉 본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제부터 우리가 본명으로 부르던 이름을 ‘주어진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주어진 이름에는 어떤 의미와 맥락이 있고 그것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나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자.
나는 얼마 전에 글쓰기 커뮤니티를 운영했어. 거기에서 나랑 이름이 똑같은 참가자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이름의 뜻까지 똑같은 거야.
대부분의 한자는 한 음 당 뜻이 10개 이상 있어. 내게 주어진 이름은 ‘동혁’인데 실제로 ‘동’ 음절은 84개, ‘혁’ 음절은 23개가 있었어. 그렇다면 이름의 의미 조합에서 1,932개의 경우의 수가 발생할 거야. 물론 이름에 쓰면 안 되는 불용한자가 있어서 경우의 수는 줄어들겠지만, 뜻이 모두 같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
내 이름은 ‘동녘 동(東)에 빛날 혁(赫)’이라는 한자로 이루어졌어. 동쪽에서 빛난다는 뜻인 데, 뜻에서 내가 태어나던 시기에 사회에 만연해있던 ‘국가주의적 가치관’이 느껴졌어. 극동 지역에 있는 ‘한국에서 빛난다’, ‘한국을 빛내라’라는 의미잖아? 입신양명(立身揚名)이라는 말처럼 출세해서 가문에 효도하고 국가의 인재가 되라는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어.
또한, 이름 자체가 너무 평범해서 일반적인 직장을 다니다가 생을 마감할 것 같은 그런 느낌도 싫었어.
출처 : 다중자아 중심 찾기 온전한 나찾기 (2024, 시원한 형, 라바)
이처럼 이름에는 시대성, 국가와 사회의 이데올로기, 부모의 기대 등이 혼합되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우리의 삶과 선택은 존중되지 않는다.
난 어릴 적부터 내 주어진 이름이 싫었다. 20년 넘게 사용해도 친숙해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이름은 나와 무관한 의미로 나를 설명한다. 나와 다른 요소들로 가득 찬 채, 타인으로부터 나를 구분 짓는 모순적인 외피다.”
그렇기에 이름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이름은 내가 존재하기 이전, 나를 대신해 세계에 나를 순응시킨 대리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식 이름은 지독히 따분하다. 성 한자와 이름 두 글자로 반복되는 영겁 회귀이며, 어딜 가도 재생되는 똑같은 장르의 클리셰 영화 같다.
내가 타인의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사실에 실망하는 사람을 종종 본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이름이 가진 구조적 문제 때문이다.
어느 나라의 이름도 한국처럼 정형화되진 않았다. 고정된 형식 안에 개인의 개성을 철저히 숨긴다. 지독히 반복되는 유사한 글자들의 반복을 멀리서 보면, 산속에 나무 한 그루 같다.
주어진 이름은, “이름보다 번호에 가깝다.”
주민등록번호를 떠올려보자.
앞자리는 생년월일, 뒷자리는 성별과 지역, 고유 번호 네 자리, 등록 순서, 검증 번호로 이루어져 있다. (주민등록번호는 위와 같은 조합으로 사용되다가 2020년부터 뒷자리가 성별을 제외하고는 무작위 숫자로 바뀌었다.)
태어난 생명은 특정 알고리즘에 따라 숫자를 부여받는다. 그 조합이 곧 주민등록번호가 되고, 결과 인구 통계 속 1이 된다.
이름도 마찬가지다. 자는 일반적으로 부의 성을 물려받는다. 부모가 협의하면 모의 성을 쓸 수 있고, 드물지게는 부의 동의 없이도 모의 성으로 변경한 사례가 있다. 법적으로 자의 청구에 따라 부에서 모로 성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민법 조항을 보면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민법 제781조(자의 성과 본)
①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2005. 3. 31. [일부개정]>
② 부가 외국인인 경우에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를 수 있다.
③ 부를 알 수 없는 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 (중략)
⑥ 자의 복리를 위하여 자의 성과 본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부, 모 또는 자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를 변경할 수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왜 우리는 부모 외에 다른 성을 쓰거나, 성을 쓰지 않을 수는 없는가?”
우리는 법적으로 성을 스스로 새로 지을 수 없다.
성을 빼고 이름만 쓰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여성 주의 진영에서 ‘부모 성 함께 쓰기 운동’이 있었다. 이는 부모 중 어느 한쪽의 성만 따르는 것이 차별이라는 문제의식에서 파생됐다. 그러나 (부모의) 성을 써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다.
성은 단순한 이름 체계를 넘어 역사와 신분, 혈통 지역 정체성까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말하자면, 성은 가문 그 자체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부모, 가족, 가문과 연결된다.
하지만 가족은 천륜이라 불리지만, 서로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 관계는 결코 필연적이지 않다. 마찬가지로, 성이 내 정체성을 상징할지 아닐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이제 성 다음은 이름이다. 한국은 돌림자(항렬자)를 사용한다. 이는 가족·종친 집단 내에서 이름에 공통적으로 쓰는 한자를 말하며, 가계(家系)의 세대나 항렬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주로 남성 후손에게 사용되며, 같은 항렬의 사촌들은 같은 돌림자를 공유한다. 최근에는 돌림자가 여성에게도 쓰이거나 아예 사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안에는 항렬을 통해 족보를 정리하고 상호 존칭을 구분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 이는 가문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기호이자 상징이다. 평생 삶에 새겨진 가문의 문신과도 같다.
이름 세 글자 중 성에는 가문 그 자체가, 두 글자 중 절반에는 가문의 위계가 새겨져 있다.
돌림자의 여부와 상관없이 중요한 부분이 있다. 이름은 집안 어른이나 작명가가 짓는다. 이때 이름 안에는 시대와 가문의 요구가 담기며, 또 유행이 반영된다.
사람들은 이름을 통해 자신을 남과 구분할 수 있다. 이름 안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담기고, 그동안 함께했던 감정과 서사도 함께 성장한다. 주변인들은 이름을 부르며, 생각하며 그 안에 다양한 감정을 담는다.
그렇기에 이름은 누군가에게 익숙해질 수 있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과 본질적인 것을 쉽게 착각한다. 익숙해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그것이 진실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이름은 내가 아니다.
번호로 불렸을 때의 이질감처럼, 난 여전히 주어진 이름과 가까워지지 못한다. 주체적 선택 없는 이름은 주민등록번호보다 훨씬 복잡한 알고리즘에 의해 파생된 번호 같은 문자들의 조합일 뿐이다.
만약 이름이 다른 이들과 나를 구분하고 나를 인식하는 도구일 뿐이라면, 교도소처럼 번호를 쓰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오히려 이름은 번호보다 더 부정적이다. 타자와 세계가 나를 포섭하고, 그 안에 나를 예속시키려는 목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난 이름이 나의 의지 바깥에 것들로 만들어진 것이 온당치 않음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짓고 살아가고 있다.
진정한 나의 존재를 담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그릇을 찾고 있다.
그것이 불가능할지라도,
나는 계속 찾는다.
그것은 나의 본명이자, 내가 선택한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