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소소한 행복에 만족해야 할까?
한때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소확행’이 유행했다. 소확행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의미다. 이 말은 경쟁에 매몰된 사회에서 사회적 성공과 무관하게 일상에 소소한 행복을 음미하는 태도를 말한다. 얼마 전 글쓰기 시간에 소확행과 유사한 주제로 글을 쓰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글이 좀처럼 써지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소확행을 환영하는 동시에 우려한다. 긍정하는 이유는 소확행이 각박해진 사회에서 스스로를 건강하게 돌보게 하기 때문이다. 숫자에 매몰된 사회에서, 우리는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나 마음이 쉽게 불안해지고 위태로워진다. 이런 메마른 삶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일은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
반면에 이 가치관을 회의적으로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이유는 청년 세대가 ‘소소하지 않은 행복’에 닿기 어려운 구조적 장벽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뽑은 행복의 조건은 좋은 배우자와 행복한 가정 이루기, 건강, 돈과 명성, 잘 맞는 직업, 여가 생활 순서로 비중이 높았다. 언급된 대부분이 이루기 쉽지 않다. 가장 높은 순위인 결혼만 보더라도, 청년 세대의 결혼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으며, 그 이유로는 물질적 조건의 부족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돈과 명성 역시 비정규직과 쉬고 있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보면 쉬운 행복의 조건이 아니다.
당신은 노력해도 쉽게 바뀌지 않는 현실에 무력감과 참담함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누구나, 평생을 일해도 서울에 아파트 하나 사기 어렵다. 현 청년 세대는 역사상 최고의 고학력자이자 산소 대신 자기 계발로 ‘호흡’한 세대다. 그런데도 질 좋은 일자리를 갖긴 어렵다. 또한, 일한다고 해도 삶은 극적으로 나아지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에서 말한 것처럼 노동 소득은 부자들이 투자해서 버는 자본·금융 소득에 비하면 현저히 낮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이 청년 세대에게 허락하는 것은 ‘소소한 행복’ 뿐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시민이자, 정치적인 주체인 인간의 특성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소확행에 대한 서사들을 보면 지극히 일상적인 면만이 강조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타인과 사회의 크고 작은 영향을 주는 행위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정치적 동물 (흔히 사회적 동물이라 번역되지만, 정치적 동물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여기서 정치는 의회 정치에 한정된 것이 아닌,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를 의미한다)이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삶과 사회의 영향을 줄 수 있고, 결국 삶의 조건들이 바뀐다. 거기서 오는 효능감도 행복의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노동과 자기 계발로 보낸다. 비좁은 시간의 새장 속에서 확실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뿐이다. 이는 자기 착취 사회에서 정치적 개입이나 사회적 실천을 배제한 채, ‘아름다운 감각’처럼 포장된다. 어쩌면 현생에 만족하고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예쁘게 꾸며진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른다.
내가 노동에 밖에 있던 그 시절(이하 그 시절)에는 애초에 ‘욜로’라 불리는 소비 지향적인 삶을 살 수 없었다. 또한, 사회적 성공과 방향도 달랐다. 그때 나는 소확행이라는 말의 유행 전에 이미 그렇게 살았다. 그 방식을 택한 주된 이유는 물론 돈이 없어서다. 또 다른 이유는, 소비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 아닌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돈 없이도 삶을 즐겁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도록, 탈자본주의적인 삶을 구축하려 노력했다. 운동하고, 자전거를 타고, 칵테일을 마시고, 싼 식재료를 구매해 카레, 브리또 같은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내 행동을, 소확행을 위한 몸부림이자 하나의 정치적 행위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소확행의 섬 속에도 결핍은 존재했다. 수도승처럼 살던 나는, 악귀 같은 여러 욕망에 쫓겼고, 또 쫓아내려 했다. 좋은 집, 비싼 차, 유행하는 신발과 옷, 전자 제품 같은 것들이 아른거렸다. 하지만, 사회가 욕망하는 대부분은 없어도 괜찮았다. 그런데도 내게 남은 욕망이 있었다. 그 소확행의 시절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 중 하나는 여행자의 행복이다. ‘그 시절’을 지나 이제 나의 일을 찾았고. 사회적 기준에서 말하는 노동에 훨씬 가까워진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미뤄 놨던 것을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그 시절, 나의 금지된 욕망은 다름 아닌 해외여행이었다. 지구에는 대략 200개의 국가가 있다. 섬처럼 막혀있는 나라에서 평생 살다 생을 마감하는 것은 감옥살이라 느껴졌다. 이 억눌린 마음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태국, 방콕 한 달 살기를 시작으로 새로운 도시에서 살아보는 여행을 시작했다.
그 시간은 나에게 너무 행복했던 시간이다. 여유롭게 아침에 일어나서 수영하고 ‘오늘은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미슐린 가이드 음식점보다 맛있는 동네 오리 국숫집은 단돈 ‘천 원’이다. 800원이면 넉넉히 포장해주는 친절한 부부의 쏨땀 노상, 집에서 5분이면 가는 야시장, 한국인에게 호감을 보이는 코리아타운에도 놀러 간다. 종종 헬스를 하고 술을 마시러 간다. 재즈바 구경도 한다.
특히 난 ‘카오 카무’라는 음식을 좋아했다. 한국어로 치면 ‘족발 덮밥’쯤 되는 이 ‘축복’은 야들야들한 다양한 부위에 족발과 채소, 삶은 계란, 이국적인 양념, 고수 그리고 태국 음식이 그렇듯 마음대로 뿌릴 소스까지 더해져 완벽했다. 거기다가 수돗물로 얼린 얼음에 맥주까지 곁들일 수 있다면, 행복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달간의 시간은 꿈처럼 지나갔다.
꿈속에서 누렸던 즐거움은 대부분 ‘소확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삶의 장소를 옮기는 일은 결코 소소한 결정이 아니다. 비행기 티켓과 숙소 비용 등 여행 경비는 물론이고, 거주지를 바꾸는 선택에는 상당한 돈과 큰 결심이 필요했다.
한국인 대부분이 3박 4일짜리 ‘관광객’으로만 머무는 것은, 오랜 시간 자신의 업을 내려놓는 일이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고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난 그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 몇 차례 한 달살이 여행을 떠났다. 나와 잘 맞지 않았던 곳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풍요로웠다. 이 경험은 나에겐 단순한 소확행을 넘는, 삶의 지평을 넓혀준 특별한 행복이었다.
내가 찾은 또 다른 행복, 그것은 새로운 인류로 사는 즐거움이다. 나는 일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일을 거부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하며, 존엄성을 잃는 삶을 거부한 것이다. 일하기 싫다고 하면서도, 노동 밖에서는 수많은 일을 하였다. 그런 모순적인 상태를 지나고, 드디어 나의 일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일은 바로 니트(NEET), 즉 일하지 않는 청년들의 지속 가능한 삶을 함께 만들어가는 일이다.
기존의 미취업자를 위한 정부의 정책은 직업 훈련을 통해 직업 안으로 그들을 구겨 넣는 것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취업을 희망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직장 생활에서의 얻은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아예 직업을 갖지 않거나, 취업과 맞지 않는 자신의 성향으로 인해 진입조차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획일적인 직업 훈련은 정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각자의 고유성은 존중받지 못하고, 사회의 신뢰를 잃기도 한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 당사자들을 만났다. 새로운 기획을 준비하며, 당사자에 대한 관점, 철학, 프로젝트 제목과 내용까지 전부 새롭게 구성했다. 처음 만난 날 어색함을 깨고 ‘왜 우리가 일에서 멀어졌는지’를 고백했다. 그리고 각자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그리고 (직업의 범주를 넘은)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했다. 그 일을 바탕으로 각자에게 맞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프로그램 첫날의 감각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가 준비한 것이 의미를 발하고, 그들과 함께 그 순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이다. 사회에서 배제되었던 내가,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했을 때,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경험했다. 그것은 나에게 짜릿한 행복 그 자체였다.
이처럼 나는 나의 선택으로 큰 행복과 마주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전적으로 긍정적이지 만은 않았다. 이별이 슬픈 이유는 사랑했기 때문이다. 난 너무 큰 행복을 가져봤기에, 그 행복이 눈앞에 없는 지금은 허망함만 가득하다. 싸고 맛있는 음식, 여유로운 사람들, 사람들의 관심, 좋은 인연,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이처럼 나에게 자극과 만족감을 주던 많은 것들은 이제 사라졌다.
그래서 지금 나는 몹시 공허하다.
원래 나는 1년에 3개월은 새로운 도시에서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2년 정도는 그 계획을 나름대로 지켰지만, 올해부터 틀어졌다. 올 초부터 교정을 시작했는데, 그로 인해 먹는 즐거움이 사라졌다. 이런 상태로 여행을 가도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거 같고, 활동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의 행복은 잠시 유예되었다.
내가 했던 프로젝트는 보상받지 않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보상받지 않고도 그런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은, 돈을 받는 일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기획할 자유가 주어질지 의문이다.
금전적 대가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프로그램’일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무리해서 일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로는 내가 견디기 어려운 상황도 있었다. 그 일을 하면서 많이 소진되었고, 동료는 나보다 훨씬 피폐해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행복한가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 크고 밀도 높은 행복을 경험했기 때문에 행복의 역치가 높아졌지만, 그런 강도의 행복은 쉽게 얻을 수 없다. 그런데도 나의 경험에 후회는 없다.
소확행의 반대편에는 사회가 정해 놓은 길 위를 달리는 사회적 성공이 있다. 우리의 선택지는 단 두 개뿐이다. 대기업에 들어가 사회적 성공을 거두거나, 아니면 소소한 행복만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둘 다 만족하지 않는다. 부와 숫자로 확인되는 성공이 아닌, 나만의 성공을 이루고 싶다. 소소한 행복과 동시에 특별한 행복을 갖고 싶다. 그 열망이 내 삶을 힘들게 만든다 해도, 포기할 수 없다. 소소한 확실한 행복 말고 개쩌는 확실한 행복을 갖고 싶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소확행 말고 개확행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