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밥상
콩 삶은 거, 무나물, 된장국. 숟가락 하나.
아버지의 밥상을 마주한 나는 눈물이 고인다.
“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그럼 난 잘 있지. 흐흐 "
“애기들은 잘 있냐?”
이제 대학생, 고등학생이 된, 다 큰 우리 진영이 주은이를 부르시는 이름이다. 아버지는 늘 당신은 괜찮다고 하시면서 아흔이 넘으신 연세에 오십을 반이나 넘긴 딸을 항상 걱정 하셨다.
밥은 먹었냐고. 차 조심, 운전 조심 하라고….
살며시 내 가슴에 아버지를 품어 안아 드린다. 단단하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던 천하를 호령 하듯 우렁찬 목소리는 어디가고 가냘픈 뼈만 잡히는 우리 아버지. 마치 어린애와 같은 그 작은 몸집이 예전의 아버지였나!
웃음이 인자하시고, 마음을 녹아내리게 할 듯한 눈웃음으로 여인들의 가슴을 많이도 설레게 했을 아버지.
가지나물, 돌나물에 고추장을 넣어 밥을 슥슥 비비시고, 소주 한잔을 늘 반주로 곁들여 드시던 아버지였다. 새콤 달콤 무쳐진 미나리나물도 아버지 밥상엔 언제나 놓여 있었다. 아버지가 좋아 하시는 갈치조림, 꽁치조림도 엄마는 밥상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그렇게 소주를 반주 삼아 맛있게 드시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선한데 아버진 지금 어디 계시는지.
5남매 중 나는, 입맛도 성격도 생김새까지도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정전이 되어도 제자리에 있는 손톱 깎기를 갖다 드릴 정도로 아버지의 비서인양 잔심부름을 많이 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셋째 딸인 나를 많이 귀여워 하셨다.
그렇게 소주를 반주로 즐겨 드셔서 그랬는지.
어느 날 알코올만 들어가면 안 하던 모습이 보이고 점점 힘들어 하셨다. 술을 대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알코올 중독 증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혈관성치매도 진전이 되어 눈웃음이 일품이시던 미소가 줄어들고, 예전의 온화한 아버지의 모습도 잃어가셨다.
일편의 방편으로 치료차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신 후의 쓰라린 가슴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까.
그 후로 아버지는 가지나물에 밥을 비벼 드시는 산해진미를 맛보지 못하셨다. 요양원에 가면 드라이브도 시켜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드린다지만 그 때의 갈치조림과 미나리나물에 소주를 반주로 드시던 그 밥상과 어찌 견줄 수 있을까.
아버지의 한 손은 사위 손을, 다른 한 손은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내 팔에 의지하며 아기 걸음 걷듯 따라 걸으신다. 뭐 사드릴까, 여쭤보면 아무거나 다 맛있다고 하시며 그저 좋아 하신다. 차를 타고 밖으로 나오시면 바람이 시원하다며 마냥 어린애와 같으시다.
단골 찻집으로 간다. 카라멜마끼아또가 달달 하다며 좋아하신다. 블루베리 와플을 남편이 한 숟가락씩 떠서 입에 넣어드리면 “너희도 먹어“ 라고 하시면서 잘도 받아 드신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지금도 애달프기만 하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 때면 아버지와 헤어질 시간이다. 하루만 자고 가라고 애원 하듯, 아버지 눈가에는 어느새 서운함이 가득하시다. 내일 또 올게요, 희망 어린 말을 남기고 오지만 단 한 번도 내일 간적은 없었고 일주일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때 아버지 곁에서 따뜻한 잠자리 한 번 되어 드리지 못 한 것이, 아버지의 간절한 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내가 지금 통곡하는 이유가 되었다.
왜 그랬는지. 집에 애들이 혼자 있다는 이유로, 교회 가야 한다는 이유로, 요양원에서 가족들이 잠자는 것을 싫어 한다는 이유로. 무슨 이유가 그리도 많은지. 모든 게 다 핑계일 뿐이다. 사랑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을 텐데….
그렇게 돌아 나오는 나에게 아버지는, 애기들 과자 사주라고 꼬깃꼬깃 접어 둔 천 원짜리 4장을 쥐어 주신다. 4천만 원 아니, 이 세상 어느 것 보다도 더 귀한 돈. “꼭 사줘라!” 하는 아버지의 말씀이 들릴 듯 말듯 사라질 때까지 안타까움만 가슴에 묻은 채 아버지를 두고 나온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그러고도 집에 와서 나는 또, 등 따뜻하고 배부른 밥상을 마주한다. 불효막심한 자식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하셨다. 가족들을 남겨 놓고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염을 하여 예쁘게 단장하신 아버지의 차가운 얼굴이 백지장 같다. 온기가 느껴졌다. 평온해 보였다.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인 천사의 얼굴이었다.
요양원 가신 후로 나는 결국, 아버지가 좋아하는 밥상을 한 번도 손수 차려드리지 못 했다. 마음뿐이었고 해 드리지 못한 모든 것은 지금도 못내 내 가슴을 후벼 파고든다. 애통한 마음이 가슴을 치게 한다. 부모의 사랑에 어떤 것을 갖다 논들 비할 수 있을까. 때를 맞춰 하지 못 한 것들. 마음을 다 하지 못 한 것에 대한 눈물은 내가 이 세상 떠날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
누구나 말을 한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잘 하라고, 부모가 되어봐야 알 수 있다고, 부모님께 했던 그대로 자식한테 받는다고….
나는 아니라고, 우습게만 여기던 그 말이 지금 나에게 이렇듯 비수로 꽂히게 될 줄이야.
좀 더 잘 해 드릴 걸 ….
그래, 나는 할 말이 없다.
아버지가 손에 쥐어 주신 천 원짜리 네 장이 지금도 고이 접힌 채로 내 지갑에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그건 돈이 아니다.
아버지의 마음이다.
아버지의 웃음이다.
아버지의 눈물이다.
지금도 인자한 웃음으로 아버지가 나를 부르신다.
“남숙아 …”
나를 기다리실 아버지가 또 웃고 계신다.
그 미소에는 하나님의 평강이 보인다.
그리운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