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맥타 Feb 21. 2019

드뷔시도 반한 가믈란

일단 한 번 들어보시라니까요


에펠탑을 처음으로 선보인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 그곳을 찾은 관람객 중에는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도 있었다. 세간의 이목이 에펠탑에 집중되었던 그때, 음악가들의 관심을 끈 또 다른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 전경


박람회장에 들어선 드뷔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주관하는 구역으로 향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자바섬(또는 자와섬,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일부)의 전통음악, 가믈란을 듣기 위해서였다. 


드뷔시는 오랫동안 자바관에 머무르면서 가믈란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이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서양의 조성 음악과는 전혀 다른 음률, 전혀 다른 원리로 진행되는 이 낯선 나라의 음악은 드뷔시에게 영감이자 희망이었다. 이날 자바관에서 들은 가믈란 음악에 대해 드뷔시는 훗날 이렇게 평가했다. 


“자바 음악의 대위법은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이 아이들 장난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리고 만약 편견을 버리고 듣는다면, 타악기적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우리[유럽]의 음악이 유랑극단에나 어울리는 미개한 소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의 자바관


가믈란에 관심을 보인 음악가는 드뷔시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2년 전에 네덜란드 정부가 파리 음악원에 선물한 가믈란 악기들을 본 경험이 있는 파리의 음악가들은 본토의 연주자들이 능숙하게 연주하는 생생한 소리를 듣기 위해 박람회장을 찾았다. <볼레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등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곡가 모리스 라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1889년의 박람회장에서 라벨 역시 드뷔시 못지않게 가믈란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는다. 가믈란에 대한 작곡가들의 관심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고, 존 케이지, 스티브 라이히, 테리 라일리, 필립 글래스, 벤저민 브리튼 등 20세기의 많은 작곡가들이 가믈란으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받았다. 


19세기 말의 자바 가믈란 - 가믈란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음악가들이 매료되었던 것일까?


가믈란은 인도네시아의 전통 합주 형태의 한 종류이다. 가믈란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악기나 조율법, 음악 스타일이 다르다. 19세기 말 파리의 음악가들이 접했던 가믈란은 자바섬, 그중에서도 자바섬 중부와 동부의 가믈란이었다. 자바식 가믈란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청동으로 만든 유율 타악기들이다. 유율 타악기는 크게 두 종류가 있는데, 실로폰처럼 생긴 악기들과, 징이나 꽹과리의 한가운데를 안쪽에서 손가락으로 꾹 누른 것처럼 생긴 공(gong)류 악기들이다. 여기에 소수의 현악기, 관악기, 북이 더해져 하나의 가믈란을 이룬다.   



자바 가믈란


가믈란의 악기들은 합주용으로만 사용된다. 구매 역시 세트로 이루어진다. 비싸다는 말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주로 왕실이나 부유한 개인이 가믈란 세트를 보유했고, 오늘날에는 연주단체나 교육기관에서 그 역할을 대신한다. 연주자는 가믈란 소유주에게 고용되어 연주를 한다. 연주자들은 보통 여러 악기를 연주할 줄 알기 때문에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오늘은 이 악기를 연주했다가 내일은 다른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연주자들이 본인 소유의 악기를 들고 와서 그 악기만 연주하는 서양의 관현악단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다. 


연주를 할 때는 악보를 보지 않는다. 악보를 보더라도 아주 단순하게 기본 선율만 적힌 악보를 본다. 연주자들은 이 기본 선율을 바탕으로 가믈란의 연주 관습에 맞게 연주를 한다. 이 연주 관습이라는 것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자바 가믈란의 경우 음악적 역할에 따라 악기들이 네 유형으로 구분된다. 우선 장단을 연주하는 북이 있다. 그리고 사물놀이의 징처럼 일정 주기로 반복되며 음악의 뼈대를 구성하는 악기들이 있다. 나머지 두 유형은 선율 연주와 관련되는데, ‘발룽안’이라고 불리는 기본 선율을 거의 그대로 연주하는 악기들과, 발룽안을 변형시켜서 장식적으로 연주하는 악기들이 있다. 연주 관습에 맞춰 연주를 한다는 것은, 각자 맡은 악기의 역할에 따라서 누군가는 악보에 적힌 기본 선율(발룽안)을 그대로 연주하고, 누군가는 그것에 즉흥적인 장식을 더하고, 누군가는 그 악보를 보면서 장단을 연주하거나 주기적인 박을 연주한다는 말이다. 


자바 가믈란 연주


사실 이런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믈란 음악의 진짜 매력은 소리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드뷔시처럼, 그리고 수많은 과거의 음악가들처럼 필자 역시 가믈란 음악에 반한 1인이다. 가믈란 음악이 어떻게 구성되며 어떤 악기로 연주되는지 미처 알기도 전에, 공명 시간이 긴 청동 소재의 유율 타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청아한 음향 그 자체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좋은 건 나누고 싶은 마음. 널리 알리고 싶은 그런 마음. 그러니까 사진까지 첨부해가며 장황하게 가믈란이 무엇인지 설명한 이유는 단지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한 번 들어보시라니까요. 









*더 들어보기


가믈란은 많은 경우 그림자극이나 무용, 노래 등을 반주한다. 전통무용과 함께 감상하는 가믈란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드뷔시가 본 가믈란은 자바의 가믈란이었지만,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아마도 발리로 여행을 가서 발리식 가믈란 공연을 보게 될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제발 그랬으면). 영상은 발리의 가믈란 합주와 다양한 전통춤으로 구성된 공연을 촬영한 것이다. 발리의 가믈란은 자바의 가믈란과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비슷한지, 한번 들어나 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너희는 서주만 안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