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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Feb 28. 2019

클래식, 꽃을 피우다 <3>

수선화

초록을 찾기 힘든 한겨울의 정원,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 있을까, 싶은 이맘 때, 놀랍게도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 미소년, 나르키소스가 물에 비친 자신에게 반해서 빠져 죽자 그 자리에 이 꽃이 피어났다고 하죠, 꽃에는 ‘자존심’, ‘자신을 사랑하다’라는 의미가 덧입혀졌습니다. 바로 수선화인데요,


수선화 (출처 : 위키미디어 커먼스)


수선화 얘기를 하니, 우리 가곡 <수선화>가 생각납니다. 1941년,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김동진은 김동명의 시 ‘수선화’에 곡을 붙였습니다. 이런 가사예요.


(1연)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는 / 애달픈 마음

(2연)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죽는 /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다시 죽는 / 가여운 넋은, 가여운 넋은 아닐까


(3연) 붙일 곳 없는 정열을 / 가슴에 깊이 감추이고/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4연) 그대는 신의 창작집 속에서 /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 불멸의 소곡

(5연)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노래에서 수선화는 “애달픈 마음”이고, “가여운 넋” 이고, 또 “적막한 얼굴”이다가, “불멸의 소곡”이며 “나의 애인”입니다. 시에서 그리는 수선화의 이런 다양한 이미지들은 음악으로도 그려지고 있어요.




작곡가가 수선화를 음악으로 그리기 위해 선택한 가장 커다란 도구는 형식입니다. 가곡은 형식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같은 선율을 여러 절에 걸쳐 노래하는 유절 형식이 있고요(예를 들면, 찬송가나 애국가처럼요, 슈베르트와 베르너의 가곡 <들장미>도 여기에 속하죠. *https://brunch.co.kr/@jh486bh/4), 반대로 반복되는 선율 없이 가사의 이미지나 분위기에 따라 자유롭게 변하는 통절 형식의 가곡이 있죠.(통절형식의 대표적인 예는 슈베르트의 <마왕> https://brunch.co.kr/@musicology/8)

<수선화>는 통절 형식(‘일관작곡방식’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함)으로 쓰인 노래입니다. 가사마다 다른, 새로운 음악이 붙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왜, 때문에, 일까요?


제일 먼저는, 김동명의 시 ‘수선화’가 자유시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5연으로 이루어진 시에서, 각 연의 음절수가 모두 다르죠. 그러니 절마다 같은 선율을 붙이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을 것 같아요. 뿐만 아닙니다. <가고파>, <못 잊어>, <목련>, <산유화> 같은 우리나라 애창 가곡을 대량으로 쓰신 작곡가 김동진 선생님은 신동이자 천재 작곡가로도 알려져 있어요.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던 노래 <봄이 오면> 기억나세요?


봄이 오면


그 곡은 무려, 초등학교 5학년 때 쓴 곡이라고 하더군요. 영감이 오면 한 자리에 앉아서, 휘리릭~하고 곡을 써버리는 작곡 스타일이었다고 하니, ‘천재설’에 더욱 무게가 실리죠. <수선화> 역시, 김동명의 시를 읽고 삘(feel)을 받아서 피아노 앞에 앉아 단숨에 완성한 곡이라고 하네요. 뿐만 아니라, <가곡의 고향>이란 책을 쓴 이향숙 선생님이 연구를 해보시니, 김동진 작곡가는 유독 통절 형식을 즐겨 썼다고 하던데... 작곡가의 곡 쓰는 스타일과도 분명 연관이 있을 거라 (이 연사 목소리 높여) 확신합니다.



가곡 <수선화> 시작 부분 악보

노래는 전주와 간주를 포함해서 모두 74마디입니다. 시작할 때는 2/4 박자 f minor(바단조)로 어둡고 쓸쓸한 음악이 흘러요. 그럴 만도 하죠. 외로움, 고독 속에 가엾게 죽었다 살아 다시 죽는 생(1, 2연)을 어찌 밝은 장조의 음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음악이 바뀝니다. 3/4박자, A♭ Major(내림가장조)로 환해지는 거죠. 음악이 먼저 바뀌고, 가사는 3연을 노래하기 시작하는데요, 그 애달픈 생은 사실, 가슴 깊이 불타는 정열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은 깊이 감추고 "쓸쓸한 웃음"을 질뿐이죠. (*음악학자 나진규 선생님이 작곡가 선생님께 전화로 여쭤보니, 사실 "빙그레 웃는"이 본래 가사인데, 출판 과정에서 바뀌었다네요. 장조 조성에는 그게 더 어울릴 수 있겠다 싶네요.)


노래의 선율을 한 번 더 들려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피아노 간주가 들려온 뒤 직전의 음악과 비슷하게 가는 듯하다가, 고음에서 길게 뽑아내는 가수의 노래와 함께, 피아니스트의 팔목 릴렉스를 경연하는 듯한 화려한 트레몰로 반주가 이어집니다. 음악은 절정으로 치닫죠. 빠르기도 늘렸다 당겼다, 다이내믹도 ppp(피아니시시모)에서 fff(포르테시시모)까지 극단을 들려주고요. 노래가 시작하는 곳에 적힌 ‘espressivo’(표현력 있게)라는 지시어가 빛을 발할 때입니다. 폭풍과 같은 변화를 경험한 마지막 부분은 점차 작아지며, 다시 단조로 돌아와서 사라지듯 곡을 마칩니다.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라는 가사가 다짐이나 의지보다는, 이룰 수 없는 희망처럼 들려오는 거죠.


나의 연인인 수선화, 음악만 들어서는 ‘해피엔딩’이 아님을 짐작해보는데요, 이 모든 게 내가 널 사랑해서, 더 많이 사랑한 내가 약자니까, 싶은 그런 결말. 내 애인이 수선화지만, 굳이 그 이름을 소리내 부르진 않겠소. (“내 애인이 수선화라고 왜 말을 못해!”라며, 고전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떠올린다면, 옛날 사람인가요) 다만 마음에 품고 그 곁을 지키는 것 뿐. 행복한 쓸쓸함. 유 노 bitter sweet. (아무말대방출) 


수선화는 고독과 그리움을 오가는 “애달픈 마음”이자 “가여운 넋”이고, 또 깊은 곳에 정열을 감추고, 겉으로는 “적막한 얼굴”을 내미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불멸의 소곡”이며 “나의 애인”이지요. 시가 다채롭게 품은 수선화, 음악을 입으니 더욱 향기와 색, 질감이 더해진 것 같습니다.




피아노 반주가 참 좋은 영상입니다. 세일 가곡 콩쿠르네요.



장애인으로 구성된 하트 앙상블과 함께 연주한 소프라노 강혜정씨 노래입니다. 노래마다 표현력이 참 좋으셔요.



사실 이 노래는 소프라노 조수미 씨의 노래로 가장 사랑을 받고 있죠. 그렇지만 소프라노 홍혜경 씨가 부른 노래도, 그야말로 수!선!!화!!!입니다. 아래 영상은 한국가곡집 녹음 장면인 것 같은데요(영화의 메이킹 필름 같기도), 앞부분 2분여까지는 ‘수선화’가 들립니다. 올림 머리에 드레스 같은 화려한 모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은 가수가 열창하는 모습도 새롭고요, “빛나는 불멸의 소곡”이 진정한 클라이맥스로 다가오는 것 같아, 추천합니다. (이어서 ‘내 마음’을 부르는데 그것도 넘나 좋네요. 맨손으로 노 저어서라도 가고 싶어지는...)




가을에 구근을 심어 두면, 잔디도 나기 전에 성질 급한 수선화가 먼저 얼굴을 내민다고 하죠. 수선화는 추위에는 강하지만 햇빛이 없는 것은 견디지 못합니다. 이미 12월부터 제주도에는 해가 잘 드는 곳에 수선화가 피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가까이 다가온 봄을 맞이하며, 음악으로 피운 세번째 꽃은, 수선화입니다.




* 참고 : 나진규 '김동진의 가곡 <수선화>에서 가사와 음악의 관계' 음악과 민족 제 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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