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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an 10. 2019

클래식 꽃을 피우다 <2>: 들장미

베르너와 슈베르트의 가곡 <들장미>


제가 어렸을 때 동네 꽃집에서는 장미 한 송이를 천원에 팔았어요. 천원이면 친구 생일 선물로 문구 종합 세트를 살 수 있었으니 꽤 큰 돈이었죠. 꽃집의 장미는 굵은 꽃대에 건강하고 풍성한 한 개의 꽃이 달린, 그야말로 우람하고 럭셔리하면서도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이었어요. 그런데요, 친구네 놀러갔다가 본 아파트 화단의 장미는 좀 달랐습니다. 여럿으로 갈라진 얇은 가지에 꽃잎이 너무 많이 겹쳐져서 다소 뚱뚱한 장미를 매달고 있었죠. (가분수 같은 모습이랄까) 아마 담장에 키우던 넝쿨 장미였던 것 같아요. 꽃집 장미는 비싸서 살 수 없으니 화단의 장미를 몇 송이 꺾어서 엄마에게 가져다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같으면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파는 장미보다는 조금 덜 날카로운 가시를 요리저리 피하면서 경비 아저씨의 눈에 띄지 않고 꽃을 꺾느라 애쓰던 그 때, 장미의 아름다움에 일찍 눈 떴던 것뿐이라고, 반성하며 죄책감도 좀 내려놓고 싶네요.



그런데요, 이런 마음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가지인가 봅니다. 우리가 어려서 배웠던 <들장미>란 제목의 동요에서도 같은 마음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들판을 거닐던 남자 아이가 빨간 장미를 발견하고 고운 색과 꽃에 반해서 꺾으려는 찰나, 그 들장미는 소년에게 가시로 찌르겠노라 위협하지요. 소년도 엄마 가져다주려고 했던 걸까요?




베르너의 <들장미 Heidenröslein>


https://youtu.be/4Ke5hYnuGxc
영상의 음량이 좀 작지만, 귀 기울여 들으면 어린이 합창단의 노래가 참 예쁘네요.


웬 아이가 보았네 / 들에 핀 장미화 /
갓 피어난 어여뿐 / 그 향기에 탐나서 / 정신없이 보네 /
장미화야 장미화 / 들에 핀 장미화 /

예쁜 가지 꺾으랴 / 들에 핀 장미화 /
꺾으려면 꺾어라 / 네 선물로 꺾어라 / 나는 너를 찌르리 /
장미화야 장미화 / 들에 핀 장미화


8분의 6박자, 장-단 장-단(길고-짧고, 길고-짧고), 하는 리듬에 맞춰 몸을 이리로~ 저리로~ 흔들며 부르던 그 노래. 19세기 독일의 작곡가 베르너는 괴테의 시 ‘들장미’에 곡을 붙였습니다. 괴테는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프리데리케라는 아가씨를 사랑했고 그 즈음 이 시를 썼다고 하는데요, 이 시를 읽은 사람들은 동심과 순수가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하고, 반대로 소년에게 꺾이는 장미의 처지가 애처롭다고도 하고… 이 가사는 어떤 어조로 읽느냐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베르너는 괴테의 시에서 2연까지를 가사로 가져왔으니 장미와 소년의 신경전까지만 다루고 있는데요, 가시를 무기로 가진 장미가 소년에게 대항할 수 없음이 분명하니, 장미의 운명은 보나마나 겠죠.



https://youtu.be/ODeBC84unh8
이렇게 부르면 장미가 너무 안쓰럽기도 하고, 장미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지기도 하네요...불쌍한 장미...ㅜㅠ




번역된 가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 노래 말고도, 슈베르트도 같은 시에 노래를 붙였습니다. 그가 빈 교외의 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1815년에 작곡한 Heidenröslein은 <월계꽃>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바 있지만, 본래 제목은 마찬가지로 ‘들장미’랍니다.


슈베르트의 <들장미 Heidenröslein D257>


이 노래는 괴테의 시를 가사로 삼은 유절(찬송가나 애국가처럼 1절, 2절, 3절 가사가 달라짐에도 같은 선율을 붙이는 형식을 말해요)형식의 가곡인데요, 베르너보다 한 연을 더 가져와서 3절 노래로 완성했네요. 마지막 3절에서 소년은 결국 장미를 꺾었고, 장미는 가시로 찔렀지만 소용없이 꺾이고 말았음을 보여주죠. 슈베르트가 이 노래를 유절형식으로 썼으니 3절까지의 가사에 같은 선율, 같은 화성, 같은 반주가 반복되는데요, 소년이, 어! 웬 장미?, 하고 다가가니 장미가, 나 꺾으면 찌를거임, 했음에도 결국 꺾였고, 이 모든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소년이 장미를 처음 발견하던 때와 여전히 같은 음악이 우리 귀에 들려오는 겁니다.


소년은 장미를 꺾었네 /
장미는 자신을 지키려고 가시로 찔렀지만
슬픔도 탄식도 소용없이 꺾이고 말았다네 /  
 장미화야 장미화 / 들에 핀 장미화


3절에서 장미는 결국 꺾이고 말았으니, 가사만 봐서는 베르너의 <들장미>보다 슈베르트의 <들장미>가 좀 더 애절할 법도 합니다만, 슈베르트는 오히려 발랄하고 통통 튀는 선율과 반주를 붙였습니다. 더군다나 악보에는 '사랑스럽게(Lieblich)'라는 지시어를 붙였죠. ‘애처롭게’ 라든지, ‘구슬프게’가 아니라, ‘사랑스럽게’.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못해봤다던 우리 슈베르트지만, 이 곡을 썼던 그 때 만큼은 혹시 모를 ‘썸’이라도 타고 있었을까,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러블리’하게 보였던 것은 아닐지, 그도 아니라면 우리가 한 때 그랬던 것처럼 마냥 어리고 순수했던 마음이 담긴 것은 아닐런지, 이 노래를 들으며 그저 상상해 볼 뿐입니다.


 

https://youtu.be/aUtf2ZHDUEA
한글 가사 자막이 있는 영상이에요. 페터 슈라이어가 노래하고, 루돌프 부흐빈더가 반주하네요.




 

장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이라는 의미를 가지는데요, 색에 따라 조금씩 꽃말이 다릅니다. 괴테의 시에 등장하는 빨간 장미는 ‘욕망’, ‘열정’, ‘아름다움’이란 뜻과 함께 ‘기쁨’이란 의미를 가진다고 하죠. 자연 상태에서 자라는 장미가 가장 아름다운 때는 5월이라고 하니, 다가올 5월에는 화단에, 담장에 피어난 장미에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봐야겠습니다. 장미처럼 아름다운 것으로 향하는 열정과 기쁨이 넘쳐날 봄이, 벌써 기다려지네요.



https://youtu.be/wB7BMHwwIxg
빈소년합창단이 아카펠라로 부른 베르너 <들장미>, 그리고 프리츠 분덜리히의 노래와 후베르트 기센의 피아노가 함께한 슈베르트의 <들장미>도 같이 들어보아요. 




삶의 곳곳을 채우는 음악 이야기, <음악다반사>,

2019년을 시작하며 음악으로 피운 두 번째 꽃은, 들장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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