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간이역

by 이현웅

국도 26호선에는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둘러보는 내 눈에 초등학교 건물이 들어왔다. 가슴 한쪽이 시큰거렸다. 감상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학교 건너편 좁은 길목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곳에 간이역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더는 기차를 볼 수 없다. 이제 더는 역무원도 승객도 볼 수 없다. 오래도록 달렸지만 더는 달릴 수 없는 녹슨 기찻길 위에는 흘러가버린 과거의 시간과 공허함이 서성이고 있었다.


몇 해 전 이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작은 간이 대합실과 키 큰 향나무, 그리고 얼룩이 지고 낡긴 했지만 입식 역명판과 그 옆을 지키는 가로등이 쓸쓸하면서도 낭만스럽게 간이역의 흔적을 알려주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마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녹슨 기찻길에는 늦가을의 퇴색한 잡초가 무성하고 선로 주위의 자갈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 새로 만들어 세워둔 작은 팻말만이 간이역의 자리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쓸쓸한 정경 뒤로 멀리 통신사 기지국 건물이 서있었다. 파아란 하늘 빛깔의 그곳은 초고속 인터넷 시대의 현재이고, 내가 서 있는 기찻길은 어느 시절에선가 멈춰버린 과거처럼 느껴졌다. 공존하는 두 지점의 시간차에 가슴이 아려왔다.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던 눈길을 멈췄다. 녹슨 기찻길과 퇴색한 잡초만이 있을 뿐인 그곳에서 나는 환영을 보았다. 그곳에 제법 큰 역사가 있었고 그 옆에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키 큰 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여섯 살의 소년이 있었다.

“후딱 집에 가 이눔아!”

나무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내게 등이 약간 굽은 역장 할아버지는 호통 치듯 그렇게 말했다.

“울 엄마 오믄 같이 갈 거랑게요.”

여섯 살의 나는 굴하지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아따 저 눔, 참 별종여. 여그가 어디라고 십리 길도 넘는 디를 와서 저러고 있댜?”

십리 길이었다. 간이역에서부터 집까지의 거리는 지경장을 가는 것만큼이나 멀었다.

세월이 지나 알게 된 것이지만 그때 어머니는 도선장에 있던 어판장에서 도매로 산 생선을 팔러 다니셨다. 농사일이 없는 날이면 아침 일찍 어머니는 큼지막한 대야를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집으로 돌아오실 때는 기차를 타셨다. 나는 기차역까지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갓난아이 때부터 어머니의 등에 업혀 그 길을 다녔다. 언제부터인가는 어머니가 나를 누나에게 맡겨놓고 혼자 다니셨다.

여섯 살 시절, 낮잠에서 깨고 나면 괜스레 슬픈 날이 많았다. 그 슬픔의 정체를 아직도 확연히 알지 못한다. 그럴 때면 나는 집을 나서 기차역을 향해 걸었다. 행상 나가신 어머니를 마중하기 위해서였다. 가족 중에 누구도, 심지어는 어머니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마중이었다.

여섯 살 어린 나이에 두 개의 산을 넘고 들판을 가로지른 먼 길로 어머니를 마중한 것은 어쩌면 슬픔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다리가 아파도, 문둥이 괴물이 나올까 너무 무서운데도 그 마중길을 걸었던 것은 어쩌면 어린 소년에게 허락된 철없는 그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중간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대개는 기차역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간이역에서 어머니를 기다렸다. 키 큰 나무 주변에서 놀고 있으면 역장 할아버지는 빨리 집에 가라며 역정을 내듯 말했다. 하지만 나를 내쫓지는 않았다. 어떤 날엔 갯주머니를 뒤적거려 사탕을 내밀기도 했다.
역장 할아버지와 나는 점점 가까워졌다.

나이로만 어른이 된 이후 나는 간이역의 소중함을 잊었다. KTX의 빠른 속도에 감탄하며 간이역에서 정차하지 않는 것을 좋아했다. 목적지에 빨리 도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까닭에 잠시 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일을 불필요한 간이역에서의 정차처럼 여겼다.
성공이라는 허울의 이름을 목표로 앞만 보며 달려온 삶에서 어느 날 문득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 나는 몹시도 지쳐있었다. 그제야 느림의 가치와 쉼의 의미를 생각하며 간이역을 떠올렸다.

더는 기차가 오지 않는, 간이역의 흔적조차 모두 사라져 버린 그곳에 나는 서 있다. 녹슨 기찻길을 따라 걷는다. 위험하다고 소리치는 역장 할아버지도, 건널목 차단기도 없는 그곳에 일여덟 살의 동무들이 있다.
기차가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레일 위에 귀를 대고 있는 동무들, 칼을 만들 심산으로 선로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동무들이 있다. 그들을 그곳에 두고 걷다 보니 철길을 가로 지룬 신작로가 나왔다.

걸음을 멈추어 세우고 길 위에 시선을 놓았다. 눈을 들어 그 길을 따라갔다. 길 어디쯤에선가 시선을 멈췄다. 그곳에 여섯 살 소녀가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왜, 말을 잘하고 싶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