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잃어버린 꿈
**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 배경, 인물은 모두 허구입니다.
하루가 꿈처럼 지나갔다.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쳤다. 하루 종일 하청업체 사람들의 전화에 시달렸고, 연락이 되지 않는 정대표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웠다.
현우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깜박 잠이 들었다. 악몽에 시달렸다. 눈을 떴다. 예기치 않은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누워있던 현우가 몸을 일으킨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어지러움이 그를 덮쳐왔다. 다시 침대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느낌으로 멍하니 누워있는데 침대가 뱅글뱅글 회전을 했다. 생애 처음으로 겪는 일이었다. 구토를 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가슴에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금방이라도 가슴이 양쪽으로 빠개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가슴을 움켜쥔 현우는 침대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죽음 직전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19를 불러야 할까?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 할까? 핸드폰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좀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순간, 현우는 차라리 이렇게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부르지 않으면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고통을 겪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얼른 이 고통이 끝나고 세상과 영원히 작별하기만을 바랐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정리되자 마음이 편해졌다. 눈을 감았다.
20분쯤 지났을까. 아니, 30분쯤? 살아있음을 알았다. 어느새 어지럼증과 가슴 통증은 사라졌다. 온몸은 맥이 풀렸고 식은땀으로 젖어있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이불을 칭칭 감아 몸을 감싸며 웅크렸다.
불면의 시간이 흘렀다. 현우는 애써 잠을 청하려 하지 않았다. 밤이 새지 않기를 바랐다. 아침이 되면 마주해야 할 일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견딜만했는데 이미 소문이 퍼져버린 까닭에 오늘부터는 더 가혹한 일들이 생길 것이 뻔했다.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현우의 생각은 점차 변해갔다. 하청업체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두려움보다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회피하는 자신의 모습이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무엇보다도 하청업체들의 전화와 항의를 신미숙 과장 혼자서 감당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현우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얼마의 돈과, 회사 사무실 보증금을 합하면 절반은 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몇 사람에게 부탁을 하면 될 것 같았다. 먼저 죽마고우 윤호를 떠올렸다. 지난 50여 년의 세월에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온 사이였다. 처음으로 돈 얘기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윤호라면 분명 해줄 것이라고 현우는 의심하지 않았다.
"현우야, 니 딱한 사정은 알겠는데... 나는 우리 사이에 돈문제가 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야."
얼마나 필요한지조차 묻지 않은 윤호가 그렇게 말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쉰둘에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한 사실이 부끄러웠다. 생사를 같이 할 수는 있어도 우정을 위해 돈 문제는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지만 그보다는 살아오면서 그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자책에 괴로웠다. 차라리 말을 하지나 말 것을 하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더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하청업체 사람들에게 기다려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정대표는 왜 이런 일을 벌이게 된 것일까. 이 정도의 돈은 스스로 조절할 능력이 있었을 텐데. 혹시 도박에 빠져있는 걸까? 아니면 무슨 말 못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되지 않았다. 정대표의 횡령 이유를 이리저리 생각하며 추측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현우는 회사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엘리베이터에 내려 회사 출입문에 이르렀을 때 문 앞에 있는 설비업체 김사장의 모습을 보았다. 회사문은 잠겨있었다. 이미 출근시간보다 한 시간 가까이 지난 시각이지만 신미숙 과장은 출근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도 현우는 마음이 서늘했다. 출입문 도어록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등줄기를 타고 뒷머리까지 올라왔다. 혹시나 싶어 신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전화기는 꺼져있었다. 곤혹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건물주 황회장이 나타났다. 예기치 않은 미묘한 상황에 현우는 까닭을 모르면서도 섬뜩함으로 몸을 떨었다.
“이대표님 워쩐 일로 오셨당가요?”
“어쩐 ... 일이라니요?”
황당하기 짝이 없는 황회장의 물음에 현우는 서늘해진 간담으로 되물었다.
“오메, 모르셨는갑소? 이 사무실 오늘 아침부로 계약 끝났는디?”
현우는 아찔했다.
“사실은 그저끄가 계약일인디 정대표가 이틀만 시간 달라고 으찌나 사정사정을 흐던지, 여그 있는 짐 어찌케 흐든 일체 상관하지 안흐겄다고 도장 찍고 계약 해지했는디 몰랐는갑소 잉. 그 머시냐 여그서 일흐던 여자분이랑 같이 왔었는디 이대표님은 모르셨던가비.”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여기서 일하던 여자분이라면....?”
“아, 왜 그 있잖으요. 신 머시기 과장이라고 아지맨지 아가씬지.”
현우는 일순 또다시 악몽을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허 참, 이대표님만 모르고 둘이는 다 알고 있었고만. 완전 짜고 쳤네.”
옆에서 듣고 있던 김사장이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을 때에야 현우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지난 3년 동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두 사람의 모습이 이제야 강한 의구심으로 떠올랐다. 정대표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이혼한 거 모르셨어요? 그 인간이 현우씨한테까지 속였군요. 그 인간 여자한테 미쳐서 부모고 자식이고 다 팽개치고 도망갔는데 모르셨어요?”
여자.... 여자.... 그 여자가 혹시 신과장이란 말인가. 현우는 정대표와 신과장의 배신에 충격으로 마치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현우의 입에서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후배 수민을 불러 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자리는 밤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맨 정신으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때 현우는 자신의 거실 소파에 누워있었다. 어떻게 집에까지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새벽 4시 12분. 고요했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이 평온함 속에서 그는 문득 죽음을 생각했다. 그 의식은 매우 깊고도 진지한 것이었다. 죽음에 대해 이만큼 강한 의식을 가졌던 적은 없었다.
죽고 싶은 이유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저 사람이 좋고, 예술이 좋고, 가치 있는 것을 향유하는 것이 좋았다. 누군가 자신의 재능을 사용하고자 도움을 청하면 그는 언제나 기꺼이 응했다. 물질보다는 정신을 사랑했고,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에서 더 큰 기쁨을 누려왔다. 지나온 인생에 후회는 아니었지만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이 무모하게까지 느껴졌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현우에게는 더 이상 살아갈 가치도 용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끝났다. 현우는 술이 덜 깬 몸을 일으켜 오디오 기기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원을 켜고 블루투스 연결 메시지가 뜨자 핸드폰 유튜브에서 노래 한 곡을 찾았다. 독일 출신의 프로그레시브락 밴드 ‘오우겐바이데(Ougenweide)’의 <Death(죽음)>이라는 곡이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음산하면서도 어둠을 싣고 점점 크게 거실을 채웠다. 현우는 마치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눈을 감고 온 정신을 끌어모아 음악을 들었다.
오, 죽음, 잠들게 해 줘.
조용히 쉬게 해 줘
지친 죄 없는 영혼을 보내자
내 비참한 가슴에서.
통행료를 내야지
내 어리석은 녀석을 불러내
내 죽음의 소리가 들려
나는 죽어야 한다
치료법은 없다.
나는 죽는다.
현우는 같은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희부연한 여명이 올 때까지 그 의식을 계속했다. 샤워를 했다. 옷을 입었다. 정장을 갖춰 입었다. 현우는 음악을 듣는 동안 내내 자살 방법을 생각했었다. 문득 수영을 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냈다. 결정했다. 인근에 있는 다리 위에서 투신을 하는 것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택시는 3분 안에 도착했다. 차도에서 난간을 넘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조금의 노력을 기울였을 뿐이었다. 난간을 붙잡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에 없던 공포가 확 밀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머니가 떠올랐다. 핸드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은 후 처음으로 통화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엄마!”
평소와는 다르게 엄마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어머니라고 부른 이후 처음이었을 것이다.
“오야, 우리 아들!”
“엄마아!”
“어이, 우리 잘난 아들인가.”
목이 메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엄마아!”
“아따, 말은 안 허고 어찌 자꾸 부르기만 헌댜?”
“......”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자꾸만 울음이 나서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에게 우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끊었다. 이제 난간을 붙잡고 있는 손을 뗀 후 강 위로 몸을 던지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그 일을 위해 현우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난간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여름이었지만 어디에선가부터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 배경, 인물은 모두 허구입니다.
매주 금요일 업데이트합니다.
다음 연재는 3월 20일(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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