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오픈 3개월 전.
새벽녘에서야 카페를 나온 우리는 어느 허름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카페를 차리겠다는 결심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나는 말 수가 줄었고 형준의 얼굴은 어두웠다. 고단한 마음으로 잠을 청하려고 누웠는데 형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쉽지 않겠네요.”
그 한 마디에 담긴 의미를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잠을 쉬이 이루지 못했다. 카페를 왜 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물음이 카페 경영 철학에 관한 질문인 줄을 알면서도 자꾸만 힘든 카페를 왜 하려고 하느냐는 질책처럼 느껴졌다.
“해야겠다, 카페.”
한 달쯤 지나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 얘기를 들은 형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힘들지 않겠어요? 잘 되는 데도 거의 없고 카페 주인들 얘기 들으니까 할 일이 아닌 것 같던데요?.”
형준의 목소리에는 염려와 불안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해야겠다.”
“그건 또 무슨 말이래요?”
훗날 내가 쓴 기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카페를 차린 사람들이 성공하면 좋겠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음악 카페가 잘 되면 좋겠다. 그들의 순수한 열정만큼이나 카페 경영도 잘하기를 바랐다. 구체적이고 치밀한 경영을 통해 카페 사업에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직접 카페를 해야 했다. 성공적인 카페 경영 과정과 노하우를 책으로 엮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직접 만나 코칭을 하는 일까지도 꿈꾸었다. 그것이 내가 카페를 하고 싶은 두 번째 이유였다(첫 번째 이유는 다음 기회에 밝히겠다).>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다. 카페를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내가 그런 야망을 품었으니 얼마나 어쭙잖은 일인가. 무모함이었고 오만이었으며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료의식을 넘은 지나친 오지랖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 자신을 <최진사 댁 셋째 딸(나처럼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르는 노래)>에 나오는 칠복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먹쇠나 밤쇠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칠복이는 호랑이 최진사 사위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은 망해도 나는 성공할 것이라고 자만했다(칠복이가 결혼 후 불행할 수도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셋째 딸에게 말도 붙이지 못한 먹쇠와 밤쇠를 부러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쩌면 첫사랑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년 시절, 동네 남자애들이 말 한 번 붙여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던, 인근 여러 동네 형들이 껄떡거려봤지만 성공하지 못한 그 아이를 내가 차지한 기억이었다. 그 일 때문이었는지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턱없는 자만심을 지녔다. ‘다른 사람은 다 안 돼도 나는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취미생활에 가까운 카페 경영이라 하더라도 손님이 없으면 유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루에 한 테이블이 와도 좋고 두 테이블이 와도 좋”다면서 카페를 차린 많은 카페 주인들은 사람을 기다리다 지치고 쓸쓸함과 권태를 못 이겨 카페를 그만두곤 했다. 하물며 경제적 이익이 있어야 하는 카페 주인은 손님 없는 현실에 얼마나 절망하고 두려워하겠는가. 진심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 생각이 무모함과 오만함일지라도 마음은 진심이었다.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의 존재로 살아간다.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 현재는 아닐지 모르나 과거 어느 한 때에는 누군가에게 빛나는 사람이었으리라. 가진 돈과 열정을 다 쏟아부었지만 빚까지 진 채 폐업을 기다리는 슬픈 카페 주인도 누군가에게는 빛나던 존재였을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사로 인해 지금,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다면 부디 심기일전하기 바란다. 다시 누군가의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소망한다. 누군가의 배우자로거나, 부모이거나 자녀로, 누군가의 희망과 기쁨이 되는,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가 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그 간절함을 담아 인디 뮤지션 '위수(WISUE)'의 <누군가의 빛나던>을 띄워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