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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굴꾼 Jul 30. 2024

2. 함부르크 브람스 박물관에 가다

그러나 사실 브람스만 있는 곳이 아니다.

베토벤, 바흐와 함께 독일 '3B'의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요하네스 브람스. (출처: IMDB)

요하네스 브람스. 1833~1897 사이 살았던 독일의 작곡가. 주요 작품으로 헝가리 무곡, 자장가, 독일 레퀴엠 등이 있다. 베토벤의 후계자라 불리기도 할 정도로 고전적 양실에 충실했던 작곡가다. 주로 기악곡을 많이 남겼으며 클라라 슈만과의 '로맨스' 로 유명하다. '고독하지만 자유롭다' 라는 모토답게 가을에 들으면 잘 어울리는 음악가로 늘 꼽힌다. 실내악과 고전적인 낭만음악을 좋아하는 내게는 피아노 트리오부터 삼중협주곡, 교향곡 등 모두 취향대로 골라담는 뷔페 1이다. 다만 브람스에게서 느껴지는 그 숨이 막히고 때로 짓눌릴 듯한 무게감을 견디지 못해 다른 작곡가로 도피하는 날이 종종 있다.


2024년 1월 30일, 독일의 사상 최장기간 철도파업이 끝난 날이었다. 원래 28일날 갈 예정이었던 함부르크행 ICE (*독일의 고속열차) 는 파업으로 인해 이후 일주일간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티켓이 되어 있었다. 천생 P (즉흥적) 인 내게는 오히려 호재였다. 베를린에서 사흘, 드레스덴에서 하루를 벌써 보낸 나는 전날 드레스덴에 갈 때와는 사뭇 다르게 우중충한 날씨에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엘베 강의 피렌체라 불리는 드레스덴을 우중충한 날에 갔더라면 그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을 테니 얼마나 안타까웠겠는가! 그에 비하면 독일 최북단에 붙어 있는 항구 도시 함부르크는 오히려 우중충해야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브람스의 음악을 햇살 쨍쨍한 날에 듣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함부르크가 내게 남긴 첫인상은 '골초 도시' 였다. 매캐한 냄새와 역을 둘러싼 흡연자들. 프랑크푸르트와 암스테르담이 내게 '대마초 도시' 로 자리매김한 걸 생각해 보면 골초 도시 정도는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인지도 모르겠다. 보도 깊은 곳에서부터 배어 올라오는 듯한 냄새가 정말 숨막혔다. 유럽 전체에서 '길빵' 이 얼마나 흔한지를 고려해보면 함부르크는 내가 처음으로 간 더러운 도시인지라 더 박한 평가를 받았던 것일 수도 있다.

함부르크 시청사다. 하늘을 보니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날씨가 좋았던 것 같다.


아무튼, 푸슬푸슬 내려서 우산도 쓰기 애매한 비와 길에 쩔어 있는 브람스의 담배 같은 담배 냄새를 동반자 삼아 나는 브람스 박물관으로 향했다. 시청사는 "여기 북독일이요" 하고 비명을 지르는 수준이었다. 베를린에서 며칠을 지내다 와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시청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예쁘다 느꼈다. 시청사 주위를 둘러싼 운하와 칙칙한 어두운 붉은색의 벽돌, 그리고 태연자악한 퉁퉁한 갈매기들 한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푸슬푸슬 내리는 비가 코트를 적시며 마치 공기 입자들이 작은 얼음처럼 옷자락을 파고드는 듯 습하면서도 추운 날씨였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걸어다니고 있으면 가끔 바닥에 유대인 추모 기념 블록들이 밟힌다. 독일에서 내심 그 블록들을 보고 싶었던 나는 하나를 찾을 때마다 숙연해지면서도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했다.


걷고, 20분 가까이를 걷고, 인적 없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브람스 박물관이 보이는...데. 사실 브람스박물관 하나만 있는 곳이 아니다! 무려 6-in 1 가성비 패키지! 함부르크랑 털끝만큼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다 전시해주는 박물관, 함부르크 작곡가하우스! (Komponisten Quartier가 정식 명칭으로, 아래서는 KQ로 칭하겠다. KQ와 브람스박물관은 같은 곳에서 운영하지만 편의상 브람스 박물관은 별도로 칭한다.) 박물관 하나 가격으로 텔레만, CPE 바흐, 하세, 펠릭스와 파니 멘델스존, 구스타프 말러, 요하네스 브람스까지 만나보세요! 농담이지만 농담이 아니다. 덕분에 한 시간 잡고 갔던 박물관을 세 시간 넘게 둘러보고 있었다. '그래, 뒤에 네 명은 알겠는데 앞에 세 명은 누구야?' 싶을 수도 있겠다. 이런 마이너 작곡가들까지 챙겨주는 박물관은 흔치 않단 말이다. 천천히 설명할 테니, 일단 지금은 함께 랜선 박물관 투어를 시작해보자.


KQ와 브람스박물관은 그 어느 곳보다도 가장 '여기가 박물관이에요! 여기요!' 티를 내는 곳이었다. 대놓고 작곡가 얼굴 일곱 개가 떡하니 바닥에 놓여 있는데 어떻게 못 발견할 수 있겠는가. 길만 제대로 찾는다면 말이다. 북유럽으로 갈수록 점점 많이 보이는 역사 속의 벽돌집이 여기도 있다. 1971년 처음 브람스 박물관으로 시작된 이 곳은, 2011년 텔레만 박물관, 2015년 CPE 바흐와 하세 박물관, 2018년에는 멘델스존 남매와 말러 박물관까지 추가되면서 규모를 늘려가고 있다. 기사를 찾아보니 향후에는 리게티나 시닛케 등의 근현대 작곡가들도 추가될 계획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으면 아득바득 긁어모아 박물관을 만든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관련이 있는데도 박물관이 없는 작곡가들-예를 들어 비발디는 베네치아에 변변찮은 박물관이 없다-에 비하면 함부르크 사람들이 유명세가 좀 덜한 작곡가들에게도 신경써주고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왼쪽부터 텔레만, CPE 바흐, 하세, 멘델스존 남매, 브람스, 말러다. 이걸 그냥 지나친다면 그것도 재능이다.


처음 9유로에 입장권을 사고 옷가지를 걸어두면 직원 분께서 헤드셋을 하나 준다. (직원 분들 가운데서도 영어를 못 하는 분이 계신다. 내가 간 날에는 연세가 있으신 여성분들이 근무중이셨는데 한 분만 영어를 할 줄 아셨다)  KQ의 특이한 점이라면 곡을 들려주는 섹션에 헤드셋이 한 개 두 개 걸려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헤드셋을 들고 다니면서 음악이 나오는 기둥에 잭을 꽂아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와 독일어 두 가지 언어가 제공되는데, 문제는 곡에 대한 설명과 원래 벽에 판넬로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은 설명들이 죄다 음악을 들려주는 기둥에서 같이 나오니 그 기둥에서 몇십분은 움직일 수가 없다. 다른 곳에서는 시각에 이상이 있는 분들을 걱정하게 된다면 이 곳에서는 청각에 이상이 있는 분들을 걱정하게 된다. 텔레만, CPE바흐, 하세의 경우 유물이 남아 있기에는 너무 옛날 사람들이고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 말러의 경우에는 함부르크가 주 활동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물이 없다. 때문에 전시장보다 설명을 듣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이 박물관 위키백과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KQ는 미디어를 대단히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작곡가들마다 두어 개 이상의 짧은 영상으로 하나의 테마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준다. 예를 들어서 50대가 되어 갑자기 식물 덕질에 푹 빠진 텔레만의 이야기라든가, 말러가 일하던 시절 함부르크의 모습이라든가 그런 것 말이다. 터치가 잘 안 먹어서 고생했다. 그리고 벽 TV의 영상 말고도 독서대 정도 높이의 다른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스크린에서는 주요 인간관계나 작품 배경, 시대 배경 등 다양한 추가 정보를 읽을 수 있다. 종종 고장나고 발열로 인해 꺼지는지 직원분들이 계속 냉각수를 가져와 식혀주고 계셨다. 멘델스존 남매 부분의 스크린은 아예 고장나서 보지 못한 것도 있었다. 나름 유지보수에 최선을 다하시는 것 같지만, 그보다 발열도 적고 터치도 잘 되는 스크린들로 교체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은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로, 현대인들에게는 잊힌 거나 다름없지만 당대에는 최고의 작곡가로 간주되었던 사람이다. 라이프치히 바흐 박물관에서 바흐가 제일도 아니오, 제이도 아니오, 고작 세 번째 대체품이나 됐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 때 라이프치히 시에서 처음 데리러 오려 했던 작곡가가 바로 텔레만이다. 텔레만은 바흐와 헨델 둘 모두와 친구였고, 무려 4000곡을 남겨 클래식 음악사에서도 손꼽히는 다작 작곡가이다. 함부르크와 텔레만은 뗄레야 뗄 수가 없는 사이로, 바흐의 27년 근속이 길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의 함부르크에서 46년이라는 어마무시한 세월을 보냈다. 함부르크에서도 인기 작곡가는 보내주기 싫었던 거다. 정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난 텔레만의 곡을 거의 들어 본 적이 없어서 텔레만에 대한 평가는 내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박물관에서 거의 처음으로 들어 본 것 같은데, 예상보다 신선한 음향이 많아서 놀랐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텔레만 전시실은 브람스 박물관보다도 내 마음에 들었던 전시실이었다. 규모가 방 3~5개 사이로, 브람스를 제외하면 다른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컸다. 유물이야 당연히 없을 거고,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현대로 온 텔레만' '음악과 식물을 모두 사랑한 텔레만' 등등의 영상 미디어를 통해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채워 주었다. 텔레만을 은근히 박물관에서 밀어 주고 있는지 다른 작곡가들 이야기는 없는데 텔레만은 책갈피도 공짜로 가져갈 수 있었고, 텔레만 전시실에는 앉아서 읽을 수 있는 관련 잡지도 몇 권 있던 것 같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텔레만의 장사꾼 면모였다. 가상의 텔레만 개인 홈페이지를 제작해서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그걸 보고 얼마나 웃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추가 설명을 읽어 보면 텔레만은 구독제로 곡 장사를 하기도 했으며 악보를 클라이막스에서 끊어 '다음 호에 계속...' 이라는 클리프행어 수법을 써 구독자들을 유지하는 교활한 면모까지 보여준다. 난 이런 장사꾼 작곡가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물론 베토벤처럼 숭고한 예술에 봉사하는 이미지들의 작곡가들도 좋지만, 작곡가들도 결국 인간이고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닌가? 비발디의 자가복제, 헨델의 돌려막기에 이은 텔레만의 구독제 장사라! 바로크 작곡가들 가운데 유달리 장사치들이 많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현대로 와버린 헬레만의 타임트립. 이런 영상들이 군데군데 있다.


CPE 바흐, 또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대바흐의 아들이며, 함부르크의 바흐라고도 불렸다. (참고로 형제인 JC 바흐는 런던의 바흐였고, WF 바흐는 현재 헨델과 같은 곳인 할레잘레에 박물관이 있다). 첫 부인에게서 나온 아이 중에서는 막내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 CPE 바흐는 지금 우리의 대바흐, JS바흐보다 훨씬 유명했어서 CPE 바흐가 아버지 대바흐를 홍보하고 회고도 하며 인지도를 끌어올리려 했을 정도였다. 베토벤의 어록 가운데 '바흐는 개천이 아니라 바다다' (독일어로 '바흐' 는 개천을 뜻한다') 에서 지칭하는 바흐는 대바흐가 아니라 CPE 바흐라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다. CPE 바흐는 비교적 고전 시대 작곡가 중 내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작곡가다. 어딘가 낭만적이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구석이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을 열심히 찾아듣는 일까지는 하지 않는다.


CPE 바흐 전시관은...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CPE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한 내용이 조금 있었고... 악기를 팔아야 했을 때 슬픈 마음에 곡까지 썼다는 이야기가 있던 것만 기억이 난다. 다만 이 KQ가 유달리 포토샵 기술인지, 딥페이크인지 뭔지를 이용해 자꾸 영상을 재생할 때 멈춰 있던 작곡가 초상화들이 한쪽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면서 웃거나, 엄지를 치켜들거나 하는데 CPE 바흐가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모습이 너무 웃겨서 기절할 뻔했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난다. 이제 그런 장난질에는 그만 좀 웃고 어른답게 굴 때가 되지 않았나 싶지만 웃긴 건 웃긴 거고 참을 수가 없다.

어째서 난 이런 입꼬리 끌어올린 초상화를 보면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걸까?

요한 아돌프 하세는 고전파 작곡가다. 무려 그 하이든과 그 모차르트가 추천장을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의 인기 작곡가였는데 지금은 다 잊혔다. 젊은 시절 하세는 테너 음역의 가수로도 활동했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도 받았지만 현재 우리가 그의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다면 아마 하세의 "이 소년은 우리 모두를 잊히게 할 것이다" 라는 모차르트에 대해 내린 평가 때문일 것이다. 성악곡과 오페라에 무관심한 내 취향 덕분에 하세는 완전히 내 안중에 없는 작곡가다. 사진을 장도 게시하지 않은 보니 그닥 인상 깊지 않은 작곡가였던 모양이다. 이곳을 관람하고 있을 때쯤에는 벌써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려 마음이 급했던 것도 있다.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 파니 멘델스존 헨젤은 1805년 태어나 1847년 사망했으며, 펠릭스 멘델스존의 누나로 잘 알려져 있지만 본인 자체로도 훌륭한 작곡가다. 가곡 '이탈리안' 은 동생의 이름 아래 출판되어 그 사실을 몰랐던 빅토리아 여왕이 가곡집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는 말을 하기도 했고, 요즘에는 여성 작곡가 재발굴의 일환으로 종종 라디오에도 나온다.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는 1809년 파니보다 4년 늦게 태어나 같은해, 1847년 사망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로, 내 유럽 여행의 시작이자 끝이나 다름 없는 작곡가고, 이 사람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를스루에 도서관에 회원등록을 하기까지 했었다. 대표작으로는 한여름 밤의 꿈 서곡, 한여름 밤의 꿈 중 축혼행진곡, 이탈리안 교향곡, 무언가 중 봄노래 등등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일단 최소한으로만 말하겠다.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 박물관 부분은 사실 내가 가장 이 박물관에서 실망스러웠던 부분이었다. 하세박물관에서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 박물관으로 넘어가는 사이에는 작은 복도가 있다. 이 복도를 넘어갈 때는 유대교의 하누카를 축하할 때 사용하는 메노라 (그 촛대 말이다) 가 붙어 있고,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을 기념하는 의미에서인지 유대계 예술인 분께서 쓴 시가 적혀 있다. 박물관에서는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의 유대계 혈통을 상당히 비중있게 서술하고 있지만, 둘의 혈통은 유대계일지언정 펠릭스는 일곱 살, 파니는 열한 살 때 이미 세례를 받아 루터교인이 되었다. 둘의 편지를 아무리 읽어 보아도, 멘델스존 남매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그리 강하지 않다. 오히려 둘 다 찬송가며, 오라토리오며, 코랄이며 개신교 쪽으로 종교적인 곡은 아주 쓸 수 있는 대로 쓰느라 난리가 났다. '그 사회에 더 잘 녹아들기 위한 비극적인 선택이었다' 고 하기에는 너무 제대로 된 개신교인들이었단 말이다. 둘의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얼마나 많은데 유대계 혈통 이야기라니, 무척 실망스러웠다. 심지어 베를린의 유대인박물관에서도 다양한 유대계/유대인 유명인들을 다루지만, 그 가운데 파니랑 펠릭스 멘델스존은 들어 있지 않다. 심지어 그 할아버지 되는 모세 멘델스존은 들어 있는데도 파니랑 펠릭스는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유대인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은데!


그래도 포토존과 전체적인 분위기 구성은 좋았다. 라이프치히 멘델스존하우스 (30화에 연재될 예정이다) 와 비슷한 분위기로, 하얀색과 밝은 파란색이 적절히 섞인 색감이 멘델스존 가족의 '가르텐하우스' 를 연상시킨다. '가르텐하우스' 는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이 어린 시절 베를린에서 살던 집에 딸린 작은 별채로, 자연이 연상되는 분위기와 전체적으로 밝고 통풍이 잘 될 것 같은 색감이었다고 한다. 이 박물관도 마찬가지로 방을 구성해 놓았으며, 갈색과 따뜻한 색감을 위주로 썼으며 의자도 평범하게 나무나 패브릭이었던 앞의 전시실과 다르게 외국 영화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하얀 나무 벤치가 있어 실제 멘델스존 가족의 정원을 살짝 옮겨 온 것 같은 느낌도 준다.

분위기가 정말 좋다. 누군가가 내 사진을 찍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동행인도 없었고... 박물관에도 사람이 없었다.


구스타프 말러는 낭만후기의 작곡가로 흔히 분류되는데, '천인 교향곡' 이나 '부활' '대지의 노래' '죽은 아이를 기리는 노래' '뿔피리의 노래' 등등 유명한 곡이 많다. 말러는 함부르크에서 잠깐 감독 일을 맡았지만, 역시나 말러 하면 함부르크보다는 비엔나다. 말러한테 당신의 도시는 어디라고 생각하냐 라 물어도 아마 비엔나라 답할 것 같고 말이다. 말러 박물관은 말러 개인보다는 함부르크에 집중했다. 말러가 봤을 법한 함부르크, 세기말 함부르크의 모습을 '지휘자 말러 씨의 하루' 같은 느낌으로 말러 일러스트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영상을 틀어 준다. 말러의 음악에도 크게 관심이 없고, 함부르크라는 도시의 역사가 궁금했던 것도 아니고, 말러가 함부르크와 그리 연이 깊지 않음을 대충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닥 흥미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무려 여섯 명의 작곡가들을 보고 나면 못 해도 두시간은 지나가는 것 같다. 특히 제공해주는 음악을 다 들으면서 가면 세 시간은 훌쩍이다.  내가 세 번째 작곡가였던 하세 파트를 지나갈 때 벌써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내가 그만큼이나 시간을 써 버렸다는 걸 깨달은 나는 급하게 펠릭스-파니 멘델스존 파트는 건너뛰다시피 하고 말러 파트도 대충 둘러본 뒤 브람스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건 내가 펠릭스와 파니 멘델스존의 인생사를 툭 치면 줄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파고들었기 때문에 한 선택이다, 결코 이 둘이 나오는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영양가가 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드디어 대망의 브람스. 브람스 박물관은 작곡가 숙소에서 나와 옆 건물로 가야 한다. 브람스 박물관은 1층과 2층이 있고, 1층은 브람스의 어린시절, 2층은 브람스의 성인 시절을 주로 다루고 있다. 브람스는 약 30살이 될 때까지 함부르크에서 살았고 함부르크를 떠난 뒤에도 고향 동네에 대한 애착은 가지고 있던 것 같다. 오디오 가이드는 따로 없고, 팜플렛이나 가이드는 태블릿을 하나 주신다. 태블릿이 몇 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이 다섯 명도 없는 박물관이니까 기기가 없어서 가이드를 못 듣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어 설명문은 따로 없고 태블릿의 설명이 영어와 독일어 2개 언어로 제공된다. 군데군데 시기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코너가 헤드셋과 함께 마련되어 있다.


소장품은 (사진을 다 잃어버려서 확신은 없는데) 브람스의 피아노, 브람스의 식기 등이 있다. 소장품이 막 화려한 편은 아니지만, 일단 원본 품목이 있다는 점에서 브람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찾아가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느낀 최고의 소장품은 브람스의 베토벤 흉상이었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데, 나선형 계단을 타고 올라가 2층으로 올라가면 등 뒤에 베토벤 흉상이 있다. 그 옆에는 태피스트리인지 그림인지 모를, '천국에 다 같이 모인 작곡가들' 같은 테마의 화면이 있다. 베토벤, 바그너, 글루크가 있던 건 확실한데 다른 작곡가들이 누가 그려져 있었는지 모르겠다. 전시는 2층 4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선형 계단이 있어 휠체어가 접근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브람스 박물관은 주로 사진이나 문서를 통해 브람스의 인생에 관한 사실을 설명한다. 가이드를 받거나 오디오가이드를 따로 챙겨가지 않는다면 단순히 문서를 찍은 사진, 피아노 사진 또는 인물의 사진이 브람스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하나의 유기적인 테마로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자세히 보면 브람스의 이름인 '요하네스' 라는 글자가 읽힌다.
브람스가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피아노를 썼다고 한다. 가끔 시연도 하는 모양이다.


브람스 박물관은 내가 2024년 유럽에 다시 와서 처음으로 갔던 작곡가 박물관이었기 때문에 아직 평가 기준이 잡혀 있지 않았다. 작곡가 박물관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뿌듯했기에 모든 게 마냥 좋아 보였던 것 같다. 지금 다시 간다면 좀 더 객관적인 눈으로 소장품들은 어떤지, 설명은 어떻고 큐레이팅은 어떤지를 더 꼼꼼히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싶어 무척 아쉽다.


관람하는 데는 예상보다 시간이 거의 걸리지 않았다. 오디오 분량이 많았던 앞의 KQ에 비하면 브람스 박물관의 설명은 모두 태블릿의 텍스트로 대체될 수 있었고, 규모도 앞의 다른 작곡가들에 비해서 딱히 엄청나게 크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나머지는 겉절이고 브람스가 메인이겠지!' 라고 기대했는데 기대에 비해서는 소박한 박물관이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브람스 박물관은 함부르크, 비엔나, 그리고 바덴바덴에 각각 하나씩이 있는데 오히려 바덴바덴의 브람스 박물관이 더 소장품이 화려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브람스 박물관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이야기한 것 같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브람스 박물관에 간다면 갈 만한 곳이 더 있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함부르크 미술관에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작,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가 전시된다. 올해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탄생 250주년이라 특별전을 위해 베를린 미술관이 빌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2025년에는 다시 함부르크 미술관으로 돌아올 것이다. 나는 운 좋게 이 작품이 대여되기 전 함부르크에서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교환학생 생활을 하며 본 모든 미술 작품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아기자기한 '방랑자' 뱃지까지 샀는데, 아직 달 곳을 찾지 못했다. 또 함부르크는 위에서 말했듯 파니와 펠릭스 멘델스존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둘은 'Marten's mill' 이라는 집에서 태어났는데, 안타깝게도 지금 집은 완전히 헐려 사라졌고 지금은 도로변에 둘의 기념비만이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초상화와 간단할 설명을 새겼고, 뒷면에는 둘의 악보가 한 줄씩 새겨져 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기념비 뒷면에 새겨져 있는 곡은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1악장' 의 도입부 선율이다. 브람스 박물관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여유가 된다면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절대 내가 멘델스존을 좋아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래피티라니! 정말 속상했다.

최종평가

명칭: Komponisten Quartier Hamburg (함부르크 작곡가...Quartier)
운영시간: 화-일 10시부터 오후 5시
입장료: 11유로, 학생할인 시 8유로 (내가 갔을 때는 9유로였는데, 인상된 것 같다.)
The Composers' Quarter Hamburg. 1 museum, 7 composers: Brahms, Telemann, Bach, Haase, Mendelsohn, Mahler - KomponistenQuartier Hamburg

1. 도시 접근성: ★★★★

함부르크는 예나 지금이나 독일의 대도시다. 오히려 지금이 가장 쇠퇴해 있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베를린에서 ICE로 한 시간이면 금방 갈 수 있으며 워낙 대도시라서 종착역이 함부르크인 열차도 많다.


2. 도시 내 접근성: ★★★

역에서 20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 인적이 드문 거리로도 접어들게 되며, 경사도 약간 있다. 여름이라면 딱 즐겁게 산책할 만하지만 겨울에는 그렇지 못하다.


3. 소장품: ★★★☆

브람스가 갖고 있거나 선물받았던 식기와, 사진 몇 장, 브람스의 자필보 정도가 있다. 소장품이 '훌륭하다'는 말까지는 할 수가 없다. 당시에는 내가 F (모조품)인지 진품인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어서 더 평가를 내리기가 어려운데, 대부분의 전시는 관련 인물이나 장소를 프린팅해 붙여 놓은 액자들로만 진행되는 걸 보면 역시 아쉽다.


4. 언어 지원: ★★★

브람스 박물관의 경우 태블릿을 통해 영어 설명이 제공되고,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이나 사진들에도 다 영어 설명이 병기되어 있다. 하지만 브람스 말고 앞의 다른 여섯 작곡가들은 때로 영어가 지원되지 않을 수 있으니 주의하기를. 시스템적으로는 영어가 지원되는 것 같은데, 스크린 문제나 오디오 문제로 영어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5. 가성비: ★

브람스 박물관만으로는 9유로, 확실히 비싸다. 하지만 다른 여섯 명의 작곡가까지 포함된다면 전혀 비싸지 않다. 오히려 9유로짜리 다른 박물관에서는 평균 1시간 반 정도를 썼다는 걸 감안했을 때 중간중간 건너뛰면서 봐도 3시간, 제대로 보면 4시간 이상은 걸리는 이곳의 가성비는 가히 최고라 할 수 있다.


6. 규모: ★★☆

이게 참 애매한데, 브람스 박물관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크지 않다. 독일의 3B라 불리는 그 유명한 브람스인데, 바흐랑 베토벤만큼은 아니더라도 전시실 4개, 그것도 기껏해야 다 합쳐 40평 정도 될 것 같은 사이즈라니... 솔직히 좀 실망스러웠다. 나였더라면 다른 작곡가들에게 각각 8~10평 정도 되는 공간을 할애해줄 바에는 브람스 박물관에 더 제대로 투자했을 것 같다.


7. 상호작용: ★★★

상호작용이라고 말하긴 애매하지만, 미디어 활용은 적극적이었고 우수했다.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도록 '텔레만 씨의 21세기 모험' '마에스트로 말러의 하루' 같은 영상들을 만들어 넣어 준 게 무척 좋았다.


8. 굿즈: ★☆

뭐가 있어야 평가를 하지 않겠는가. 엽서 몇 장 정도 파는 게 끝인데 뭘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굿즈샵이 따로 공간을 할애받은 것도 아니고, 4개 전시실 중에 0.5개 정도 되는 공간에 테이블 하나 놓고 굿즈를 팔고 있다. 세상에...


9. 큐레이팅: ★★★

평범하고 무난했다. 전시된 순서를 제대로 따라가면 브람스의 어린 시절부터 브람스의 말년까지를 쓱 둘러볼 수 있다. 사실 작곡가의 생애를 따라 전시하는 이 방식은 가장 보편적이고 무난한데, 약간은 게을러 보일 때도 있기 때문에 나는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10. 총평:

브람스를 기대하고 가면 실망스럽다. 하지만 텔레만이나 CPE바흐, 하세를 좋아하는 당신에게는 당신의 애정 작곡가를 알뜰살뜰히 챙겨주는 놀라운 박물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아뇨, 텔레만을 더 좋아하는 것 같던데요.

최대 장점: 최고의 가성비, 무려 작곡가 일곱 명을 단돈 9유로에 만날 수 있다니.

최대 단점: 명성에 비해 아쉬운 브람스 박물관의 규모

추천 여부: △ (텔레만, CPE바흐, 하세를 좋아하거나, 브람스의 자취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싶다면...)


브람스 박물관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2월과 3월달은 작곡가 박물관 투어를 하지 않고 교환학생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지만, 진짜 투어는 4월부터 시작된다. 텔레만처럼 나도, '다음 화에 계속'.


3화 예고: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1824년 태어나 1884년 사망한 체코의 작곡가. 대표작은 '나의 조국' 중 '블타바' 와 '팔려간 신부' 등이 있다. 2024년 4월, 주황 지붕과 파란 물결을 잇는 카를교에 서서 그의 음악에 감동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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